모모 – 미하엘 엔데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중에
시간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루에 수십번씩 시계를 보는 사람들로 세상을 터질 듯 하다

우리는 분명히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시계를 발명했고
그러한 사람들이 되기 위해 시계를 보고 있다.
일분 일초를 표시하는 시계는
‘너의 생은 결국 내가 하루 24바퀴씩 365일 동안 도는것을 80번 반복하는 시간 밖에 안돼!
그니까 내가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는걸 잘보고 낭비하지 말아야해!’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매일 매일 한바뀌 도니 제자리인것 같지? 라고 말하며
한바퀴 한바퀴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흔히 떠올리는 옛날 모습은
하루종일 농사짓고 해지면 집에들어와 밥먹고 자는 모습이다.
그때에는 모든게 시간이 많이 걸렸다.
수확물을 얻기 위해서는 반년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고
옷감을 짜도 하루 종일 짜야 했다.
천천히가 당연했고 그런걸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빡빡하다고 볼수 있겠지만 심지어 빡빡한 모습이라 할 지라도
그들보다 모든걸 수십배 빠르게, ‘효율적’으로 하는 이 세상은 더 낳아 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모든것이 분명 빨라지고 빡빡하게 살아가는 데에도
왜 사람들에게 여유가 생기지 않는 것일까?

모모처럼 진드거니 누군가의 말을 들어 줄수 있는 ‘시간’이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빨리 빨리의 확산은 우리에게 예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 무엇인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낀다.
참 긴 길을 한번 쓸고 한번 쉬고 한번 쓸고 한번 쉬며 일하면
어느새 일이 다 되어 있다는 청소부의 말은 현대인들에게 생소하게 들려온다.
그냥 빨리 끝내고 쉬면 되지 않는가? 라는 물음을 자아내는 부분이다.
같은 시간을 일하고 같은 시간을 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두개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청소부는 느긋함을 안다. 그리고 일을 즐길 수 도 있으며, 신중한 고민을 할 시간이 생긴다.
그러나 현대인은 일을 하면서 압박감에 시달리고, 결코 일을 즐겁게 할수 없다.
더 많은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정성이 덜 가게 된다. 빠른 고민을 요구하는 속에서
휴식이라는 특정한 시간의 편함과 대조되는 일 하는 시간은 어느새 고통이 되어 버린다.

옛날 어디 선가 읽은 일화가 있다.
지방을 왔다 갔다 해야 하는 한 직장인이 있다.
평소처럼 지방으로 가야 하는 일을 맡았다.
다른 날에는 분명 이,삼일의 시간이 주어졌지만
어느날 부터인가 그 날이 하루로 줄었다.
ktx가 만들어지고 난 후의 변화였다.
그리고 그는 답답함을 느꼈다. 이삼일 걸릴 때는 풍경을 보면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여유롭게 일을 처리하고 왔었지만
이제는 아침에가서 일을 처리하고 저녁에 와야 했다.
아무것도 볼수 없었고 더 많을 ‘일’을 할수 있었다.

아마 지금의 사회 어디서든 이러한 현상이 존재 할 것이다.
밥 짓는 시간이 아까워 압력 밥솥이 나왔고
더 빠른 교통수단이 발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 행복해 졌나??
밥 짓는 시간대신 더 많은 시간을
교통체증으로 더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닐까?
맛있는 밥을 먹는것을 한두번의 하늘 보기를….

천천히 갈수록 빨리가는 그 공간은
하나의 진리라고 생각 한다. 머릿 속으로 수없이 생각해 나오는 결론은
결코 바뀔 일이 없다.
순간적인 결정은 수없이 많이 바뀐다.
어떤게 현대인이 추구하는 효율성인가?
어떤걸 현대인은 추구하는가?

신호들을 건널때 언제나 나는 빨리 뛰었다.
뛰진 않아도 보도를 걷는 것보단 빨랐다.
어떤사람들은 차의 신호가 주황생만되도 건넌다.
그런데 천천히 걸어 보았다.
주변 사람들보다 느리게, 모든 사람들이 내앞으로 나왔고
나는 여유롭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신호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을 벗고 그렇게 걸으니 여유로웠고
급한 사람들이 눈에 띄었고, 다 건넜을때 남은 파란신호 표시를 볼수 있었다.

인간은 여유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동물이 자고 편한한 자세로, 포근한 표정에서
어깨가 내려가는 까닭이 있다고 생각한다.

본능 뿐 아니라 여유에는 많은 이점이 있어 보인다.
여유는 상상력을 자극 시킨다.
처음 부분에서 모모가 조용히 들어주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끊지 않을 것이란 믿은을 만들어주고
말하는 사람에게 여유를 준다.
그 여유속에서 문제가 스스로 해결되고
기기는 언제나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모모같이 행동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내 생각을 위한 여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여유 또한 필요 하다고 본다

‘노는 법’까지 가르쳐 주는 탁아소는
정말 ‘효율적’으로 놀게 해준다
어떻게 놀지 고민 하지 않아도 되고
정해진 놀이로 사람들마다 맞출 필요도 없다.
사실 이 부분에서 충격을 많이 받았다.
노는 법을 가르쳐 준다…… 이런 생각은 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놀기위해 상상했던가? 라는 질문은 뭔가가 잘못됬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모든것은 행복해지기 위한 발전임에 분명하다.
여기 저기서 그렇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런데 당신은 행복한가? 라 물으면 행복해! 하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분명 계속 발전하고 있는데
여유한번 부려볼 시간이 왜 없는 걸까?
이걸 쓰다가 갑자기 어쩌면 똑똑한 사람들은 이것이 켤코 행복해지기 위한 발전이 아닐 것임을
아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들이 늘어짐을 느끼고 게을러 짐에서 느껴지는 행복(?)을 위해
입을 닫고 있나?
그리고 부려지는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하게,
상상하게 되면 멋진 생각을 가지게 되고,
자신들의 불합리함을 깨달게 될까봐,
여유를 없애는 것을 아닐까?

살짝 극단적이기도 하고 좌파적안 생각 이기도 한 생각이라고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발전함에 따라 죄어오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런 생각을 떠올린다.
많은 사람들이 어쩔수 없이 여유를 포기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여유를 무시한다.
상상하는 습관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여유롭게 학교에서 집으로 와봤다.
신기하게도 같은 시간에 도착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다.
같은 24시간은 누구는 길고 여유롭게 보내고
누구는 24시간도 모자라서 헉헉댄다.
일의 양의 차이라기 보다는 결국은 마음 가짐의 결과가 이닐까?

난 행복하게 살고 싶고
여유가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곪아 썩어가는 것들을 두 눈에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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