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봄

읽은지는 한참 됐는데, 나의 귀차니즘은 끝이 없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쓰는게 신기할 뿐이다.

특히 한국에게 고향은 농촌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논과 밭 옆에 조그맣게 지어진 초가집 하나.
그 안의 초롱불 있고 할머니가 옛날 이야기를 해 주는.
특히 동양에서는 자연을 소중히 여겼다.
동양의 많은 종교들은 자연을 소중히 여겼으며, 자연에서 즐기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여겼고,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최고의 능력으로 여겼다.

서양은 조금 다른 관점으로 자연에 다가갔다.
지금의 결과만 따지면 그들이 잘못한게 되지만, 어느 누가 그것에 욕할 수 있을까?
사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자연을 파괴해야만 한다.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내가 꽤 어렸을 때였다.
동물들이 죽는 것을 불쌍히 여기기 시작한 순진한 어린아이는
식물도 생명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것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스스로 딜레마에 빠졌다.
난 뭘 먹고 살지?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 겠다는 그 마음은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부질없었다.
그 후 그 아이의 그것에 관한 회로는 멈춰졌다.

동양은 적당한 사용이라는 참 모순적이고 어쩌면 위선적인 방법을 택했던 것이고
서양은, 그때의 서양은 끝이 없어 보이는 자연을 자신이 살아야할 야만적인 본능의 희생자로 삼았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서양의 자연정복적인 모습은 편한함을 추구했다. 뭐가 나쁜가? 편하겠다는데,
그런데 과한 편함을 원한 인간들은 머리 굴리기를 포기 했으며
현재상황을 보기를 거부했다.

무한 소비를 위해
효율성이란 이름을 들이대고
가장 비효율적인 편한, 이제는 편하지도 않은 방법을 추구했다.

그 결과는 침묵의 봄으로 나타났다. 아무것도 없는.
자연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가 쉽게 거론할 수 조차 없다.
그 정밀함에 경의롭고,
그 오랜세월에 존경해야 하는 것이고,
그 보복에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정말 한만큼 주는 것 같다.
파괴의 대가를 파괴로써,
무지의 대가를 침묵으로써.
자만의 대가를 부끄러움으로써.

저멀리서 보이는 산들을 그렇게 반가워 하면서
서울을 정말 사랑하는 엄마는.
위선적이며 무지한 인간의 한명이다.
자연으로 다가가기를 두려워한다는 말로 벽을 친 나도 그중에 낀다.

지금 컴퓨터 앞에서 수많은 에너지를 쓰로 그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 지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어
침묵의 지역은 늘어만 간다. 

곪아 썩어가는 것들을 두 눈에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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