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아시아의 고대 국가 형성과 국제 관계
동아시아 문화의 시작이나 그 기원을 선사문화부터 생각할 수 있다. 예전에는 한 곳에서 형성된 특정 문화가 퍼졌나가면서 그것이 변형되어 동아지아 지역 곳곳의 문화가 생성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최근에는 문화라는 것은 여러지역의 문화들이 하나로 합쳐져 생성 되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중원지방의 양소, 대문구를 포괄하는 황하로 부터 지역별 문화 중심이 생겨났다. 만주 지방 쪽에는 요하문명이 생겼고, 그 외에도 다양한 지역 문화와 다민족이 섞여 중국과, 동아시아 문화를 형성하였다. 요하문명은 한반도로 많이 들어왔다고 예측되며, 중국읜 화하와 요하 문명을 통합해 이루어 졌다고 말하진다. 최근 중국은 이러한 문화적기원이 자신들의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들어 동북공정에 이용하고 있다. 또한 여러 문화 뿐 아니라 여러 민족을 통합하고 흡수하여 만들어지 국가인 중국은 다민족 통일국가론을 강조한다. 다민족 통일국가론을 강조하는데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티베트, 조선족, 회족 등 크게 5민족 정도가 중국영토내에 살고 있어 국경이 약하며, 중국 내에는 각각의 특징과 그들만의 결속력을 가진 여러 민족이 살고 있어서, 통일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민족통일국가론을 강조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민족주의 대신 애국주의를 강조한다.
신석기 문화는 기원전 3천년경으로 부터 주변으로 확대 되었다고 생각되며, 황하 양자강 요녕지역 간 교류도 이루어 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 문화는 토기와 농경생활을 기반으로 한다.
좀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동아시아는 바다로 갈라져 있지 않았다. 1만6-7천년 전부터 온난화로 인해 한반도와 일본이 갈라졌으며, 그전에는 인간들이 도보로 이동할 수 있었기에 인구와 문화의 전파가 수월했었다. 선사시대의 동아시아는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는데, 600mm 강수량과 기온이 그 원인이다. 목축도 강수량이 400mm이하인 지점에서 발전했다. 사실 정착민은 목축과 수렵사회의 낙오자라는 해석도 있기도 하다. 유목민들이이 자부심을 가지고 농경사회를 공격하기도 하다.
흉노라고 부르는 북쪽 민곡과 한나라의 사회 인식차이를 드러내는 이야기가 있다. 한나라의 사신이 흉노족에게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다는점, 형사처수법이 존재한다는 점, 예법이 간단하다는 점을 들면서, 발전되지 않았고 이해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는 이야기하 있다. 그러나 반대로 흉노족의 상황을 생각할 때, 계속 이동해야 하는 흉노족으로 써는 한나라의 예법은 너무나 복잡했고, 민족을 이끌어 나가고 사냥이나 전쟁을 통해 얻어지는 자원들은 젊은이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노인을 그정도로 공경할 수 없었으며, 형이 죽으면 형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는 형사처수법은 한나라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기 이전에 가족을 계속 부양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서로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적었음을 알 수 있다. 한나라는 이러한 다름과 그들의 공격을 두려워 하면서 만리장성 증축을 시작하였다. 한반도에서는 수렵과 목축문화, 예를 들어 부여 , 고구려, 옥저, 도예, 숙신, 읍루, 말갈등이 있으며 농경문화는 사회 제도적 국가 형태인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 세워진 것과 연관되어 약 기원전 삼천년전부터 시작 되었다고 본다.
국가의 성립
중국은 삼황오제라고 하는 왕들의 역사를 중국의 전설이며 역사로 여긴다. 특히 삼황을 사람들이 지상에서 살도록 하늘에서 내려보낸 왕으로 생각하며, 요임금과 순임금의 시대를 선왕시대라고 한다.하왕조의 우왕부터 실제 역사가 전개된다고 생각한다. 이전까지는 임금은 화하의 치수를 장 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 왕조인 상나라는 은나라라고도 불리며 도읍지는 윤허이다. 왕이 제사장의 기능을 겸했으며 청동제기를 사용한 흔적과 희생 제례를 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중심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기원전 1066년 주나라가 세워진다. 기원전 1046년 무왕은 봉건체제를 실시했다. 무왕은 자신의 친족들과 공신들을 지역으로 보내어 제후로 임명했다. 그들은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흙더미를 쌓아(봉) 방어 체제를 구축(건)했는데 이건이 봉건의 기원이다. 제후들은 자기가 받은 땅을 상속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고 그래서 세대가 지날 수 록 주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주나라는 종법 사회 였으며, 관료제, 정전법의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공자의 유가문화의 이상 시대이다. 그러나 공자가 꿈꿨던 그 이상과의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기원전 770년 춘추시대가 시작되었다. 주는 호경에서 낙양으로 천도를 하고 이때를 동주라 한다. 이 시대에는 주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봉건제도가 해체된다.수많은 패자들이 존재하는 시대이다. 존양왕이라는 명분아래 힘이 셌던 패자들은 주변 국가들을 흡수 했다. 또한 계절존망이라 하여 주나라가 건제할 당시에는 제후들끼리 전쟁을 하더라도 그 대를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그것을 어긴 나라들은 응징해야 한다는 논리도 주변국 정복의 또다른 명분이었다. 춘추라는 명칭은 공자가 지은 ‘춘추’라는 책에서 나왔으며, 공자는 춘추에 유교 기준에 맞춰 옳고 그름을 따져 역사를 기술했다. 이러한 기록 방식에서 ‘역사는 거울’이라는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드러난다.
그 중에서 진나라는 중국대륙 중심 쪽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염철전매를 기반으로 힘을 키웠다.제후국들이 패권을 다루는 가원데 제후국 중 진이 세력이 약해져 기원전 403년 전국 시대에는 명분도 사라지고 모두 자신들이 유일한 패자가 되기위해 전쟁을 한다.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는 가운데 제후국 중 진(晉)이 세력이 약해져 한(韓), 위(魏), 조(趙) 세 나라로 분열되는데, 이 세 나라는 기원전 403년에 주 왕실로부터 제후국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이 때부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를 전국시대(기원전 403-기원전 221)라 한다. ‘전국(戰國)’시대란 명칭은 전한 말기 유향(劉向)이 기원전 453년부터 기원전 246년 사이의 역사를 정리한 『전국책』이란 책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국시대에 대표적인 제후국으로 진(秦), 위(魏), 조(趙), 한(韓), 제(齊), 초(楚), 연(燕) 일곱 나라가 있으니 이를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한다. 이 칠웅 가운데 진나라는 상앙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에 힘쓰는데, 특히 법가 사상을 채택하여 법의 집행을 엄격히 시행하였다. 상앙은 백성들이 법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10금의 상금을 걸고 3장 길이의 나무기둥을 남문에서 북문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나 이렇게 쉬운 일에 10금의 상금을 준다는 공고를 아무도 믿지 않았다.
조공과 책봉은 주국이 외국을 상대하는 관계의 한 유형이며, 중국적 세계질서를 규정하는 양식이며, 주변 국가가 중국의 여러 왕조와 맺는 외교관계의 한 형식에 불과하다. 만약 조공책봉관계를 문제 삼아 종주국과 복속국으로 간주한다면, 여기에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 왜(일본), 베트남도 해당되며, 고려와 조선까지 해당되므로 우리의 역사는 모두 중국사의 일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중국은 조공과 책봉을 근거로 하여 고구려를 중국사로 편입시킨 다음, 어쩌면 한국의 역사 모두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구한말 조미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청나라가 조약문에 ‘조선은 청나라의 속방’이라는 문구를 집어넣자고 하였다가 미국 특사가 본국에 물어보겠다고 하여 본문에서 빼낸 역사적 경험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과거에는 조공과 책봉에 대한 연구가 종주국과 복속국의 정치적 관계로 이해되었으나, 조공품보다 회사품(回謝品)이 많다는 데 착안하여, 무역이라는 측면으로 이해가 바뀌기도 하였다. 고려의 경우 일 년에 세 번 송나라에 조공을 하려 하였으나, 송나라가 고려에게 삼 년에 한 번만 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종주국과 복속국의 관계라면 자주 오도록 강요하였을 텐데, 오히려 횟수를 줄이도록 한 것을 보면 정치적 측면보다는 무역의 측면으로 보는 것이 일리 있어 보인다.
미국의 중국사학자들이 조공과 책봉에 대해 몇 년간 연구한 결과 그들은 이를 동아시아의 고전적 국제질서라고 하였다.즉,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 제국이 조공과 책봉을 통하여 국제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조공과 책봉을 통하여 동아시아의 한 일원이라는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절차라고 파악한 것이다.
진한시기(-221~220)
북방 초원의 흉노세력이 통합 되어 그 세력이 강성해 졌다. 중국역사에서 흉노는 틈마 있으면 전국시대 나라인 연,조,진나라를 침략하던 골칫거리였다. 이 세나라는 모두 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았다. 이것이 만리장성의 기원이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흉노를 공격하였지만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진에 이어 등장한 유방의 한나라도 흉노의 공격으로 시달렸을 뿐 흉노 제압에는 실패하였다. 한고조 유방의 경우 흉노와의 전쟁에서 포위당했다가 가까스로 뇌물을 주고 빠져나오기도 하였다. 이후 여자와 공남을 보내 굴욕적인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한무제 때 와서는 다시 흉노와의 전쟁을 시작하였는데 이 전쟁은 40년간 계속되었다. -한무제가 위만 조선을 공격하고 그곳에 군현을 설치하려 한 것도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위만조선과 북부여가 흉노와 손을 찹는 것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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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지역은 고조선 (-2333 ~-188), 남방엔 남월이 있었다.
한이 흉노에 대해 취한 화친 정책은 고조에서부터 무제에 이르는 60여 년 간 유지되어 왔다. 무제가 기원전 141년에 즉위하자 흉노에 대한 굴욕적인 화친 정책을 버리고 강력한 흉노정벌 정책을 채택하였다. 경제적으로도중국의주요생상품인비단의 수출 증대를 위해,흉노의 방해를 받고 있는 내륙 아시아에서 이란을 통해 지중해에 이르는 소위’비단길’의 안정적 확보가 급선무였다.기원전 129년 이후 기원전 119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위청, 곽거병(藿去病) 등이 이끄는 한군과 흉노의 대격전이 있었다. 한군의 막대한 손실과 함께 흉노의 피해도 극심하였다. 흉노가 한군의 공격을 받아 타격을 입고 예봉이 꺾였다. 이에 이치사는, 한의 조정에 사신을 보내 종실 간 혼인을 통한 관계 개선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치욕적인 군신 관계(君臣關係)를 제의하며, 흉노 선우를 외신(外臣)으로 격하하자 이에 격분한 이치사는 중국과의 화친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한의 피해도 막심하였다. 곽거병과 이치사의 전투에서 쌍방이 각각 80,000∼90,000의 군사를 잃었다. 더욱이 중국은 140,000필의 말 중에서 겨우 30,000필을 수습할 수 있었다. 전마(戰馬)의 피해를 향후 중국 기병의 흉노 정벌을 둔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기원전 119년, 위청과 곽거병이 마지막 출정을 한 후 20년 동안은 한과 흉노 사이에 대규모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흉노에 대한 북벌(北伐)이 전과는 달리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로 전공(戰功)을 탐하는 군부의 파벌 싸움으로 한군은 예전과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또 이 시기에, 무제는 서역과 고조선(古朝鮮)에 대한 정복에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고조선을 정벌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것이 이때이다(B.C. 108). 기원전 104년에는 외척 이광리(李廣利)를 서역 일대에 파견해 페르가나(大宛)를 정복하고, 서역 일대에 대한 한의 패권을 확립하였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09531&cid=799&categoryId=3270
-흉노족 왕망도 한나라를 무너뜨린 후에 동족인 북부의 흉노족을 치기 위해 고구려에 군사를 요청했으나, 서기 400년 시란의 요청으로 광개토왕이 내려보낸 5만의 군대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신라의 수도 금성에 주둔군을 남겼다.
-239년에는 히미코가 위나라에 조공을 하여, “친위왜왕”(親魏倭王 위를 섬기는 일본 왕)이 새겨진 금도장(金印)과 동경을 받았다.
http://ko.wikipedia.org/wiki/%EC%9D%BC%EB%B3%B8-%EC%A4%91%EA%B5%AD_%EA%B4%80%EA%B3%84
-서역(아랍) 기원전 139–파견, 흉노를 두려워 했기 때문에
3-7세기(위진수당 시기)
유목민족이 화북을 점령했다. 중국 내 왕조를 세우기도 한다. 강남지역에는 한족 왕조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시기의 고구려, 백제는 중국의 힘이 약해진 사이 한반도 내 독자성이 증가 되었고, 회유적, 전통성 획들과 주위에 대한 상대적 우위 확보의 수단?
수당과 고구려의 관계, 백제, 신라와 당과의 관계, 나당 연합, 당 퇴각(통일신라와 한반도내 단일국가의 역사 -오늘의 의미). 6세기 말 중국의 ㄴ위진남북조 시대의 분열을 끝내고 수나라에 의해 통일 되었다. 중국의 통일은 한반도에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는ㄴ 수를 견제하기 위해 돌권, 백제, 왜와 동맹을 체결하였고 이에 수는 신라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이를 남북 세력과 동서 세력사이의 긴장관계를 뜻하는 십자형 외교라고 한다. 7세기 중엽 조선반도에서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일본이 백제에 지원군을 보냈지만 663년 반도 남서부의 백촌강에서 전쟁이 벌여졌는데 이틀간의 전투 끝에 에 나당 연합군이 승리하게 된다.
백촌강 전투는 백제 잔류저항 세력과 왜의 연합군이 당에게 철저하게 패배하는 것으로 결말지어집니다. 왜는 이 전투의 결과로 나-당 연합군이 역습할 것을 두려워하게 되고, 즉각 일본 열도의 방비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시기 백제 유민들은 왜로 무수히 망명하였습니다.
백촌강 전투는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에서 매우 결정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왜 는 이 시기를 경계로 일본이라는 국가체제를 집중적으로 정비해나가고, 일본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본서기(日本書紀)> 집필에 착수하는 등 전투 패배의 충격을 정치적, 사상적으로 일본의 동력이 되게 전환시켜나갑니다.
당 은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백제가 지배했던 영토를 자신의 점령지로 인식하고 총독부에 해당하는 도독부를 설치하지만, 즉각 신라의 반격에 직면하게 됩니다. 신라에 의한 통일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심대한 변화를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중국 대륙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는 각기 독자화 됩니다. 당 과 신라, 백제와 일본,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라는 상호 동맹관계는 매우 한시적이었고, 신라의 통일은 이러한 동맹관계를 모두 소멸시키면서 새로운 국제적 긴장상태를 가져오고 고구려 유민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된 발해지역은 통일신라와 더불어 남북국(南北國)시대를 이루는 축이 되었습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432
당의 제도-당나라의 경우는 상당히 대외적인 국가였습니다. 탈라스 전투에서 비단길 경영권을 잃기 전까지는.. 주변국과 활발한 교역을 했음을 알수 있구요.. 또한 이때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크리스트 교가 서역을 통해서 전파되기도 합니다.
또한 당나라의 중국사, 동양사에서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유,불교와 율령체제를 바탕으로한.. 중,한,일의 동북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는 데 기여합니다. 이것은 명나라 시기에 완성된다고 할수 있구요.. 결과적으로 중국을 동북 아시아 중심에 위치하게끔 합니다. 물론 중국 뿐만아니라. 한, 일 또한 중국의 우수한 문화를 수용함으로써 왕권강화와 더불어 문화적 중흥을 맞이하게 됩니다.
#######크리미아 국제 정세 ######
1941~44년 2차대전 중엔 독일 군에 점령당하기도 했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에 지금 전운(戰雲)이 짙다. 오는 16일의 러시아 합병 여부 주민투표를 앞두고 그를 저지하려는 미국이 흑해에 전함을 파견하고 EU 16개국의 나토군이 연합훈련을 벌이는 등 러시아와의 제2의 크림전쟁이 터지느냐 마느냐의 중대 시기인 것이다. 기독교와 러시아정교의 갈등으로 촉발된 크림전쟁에선 니콜라이1세가 전쟁 중 사망하는 등 러시아가 패했지만 그게 러시아 근대화의 전환점이 됐다. 아조프(Azov)해(海)를 남서쪽으로 가로막으면서 흑해로 돌출한 크림반도(크리미아반도), 얄타와 알루프카 등 세계적인 휴양지로 유명한 그곳이 전화에 휩쓸려선 안 된다.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816676
친 러시아 무장세력이 크림자치정부 청사를 점거하고 러시아도 전투기로 무력시위를 하면서 크림반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자칫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CNN 방송은 우크라이나의 일부이지만 자치공화국 지위를 가진 크림 반도가 지역적·역사적 특징 때문에 우크라이나 사태의 `화약고`가 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남쪽 끝에 있는 지역으로 흑해와 접해 있고 비옥한 농토를 지닌 곳이다. 이런 장점 때문에 러시아 등 주변국들이 과거에도 중요시 여겨왔다. 수백년간 러시아 땅이였으며 소련시절인 1954년 우크라이나가 가져갔다. 1991년 소련 붕괴 후에 이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에 남느냐 아니면 러시아와 합병하느냐를 놓고 논란이 일었고 결국 투표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속하기로 결정, 현재와 같은 자치공화국 형태로 남게 됐다. 27일 크림 자치정부 청사를 점거한 무장세력이 러시아 국기를 내건 것도 이 같은 배경 때문이다. 크림반도 지역은 러시아계 주민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러시아계 주민은 현재도 약 60%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인구구성이 이번 갈등을 촉발한 주요인 가운데 하나다. 러시아계는 러시아와 합치자고 주장하고 우크라이나계와 타타르인은 이에 반대하고 있는 것. 또한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흑해함대 주둔지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크림반도 남부 항구도시인 세바스토폴에 230년간 자국 함대를 주둔시켜왔다. 이곳은 터키 북부를 마주하고 있고 지중해와 이어져 중동이나 발칸반도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용이하다. 다만 일각에서는 러시아에서 흑해함대의 중요성이 과장됐다고 말한다. 러시아 전체 함대에서 흑해함대의 비중은 가장 작은 편에 속하고 실제로 러시아도 흑해함대를 새로 확장, 노보로시스크로 옮길 계획이기 때문.
역사적으로도 이 지역은 열강의 격돌지이기도 하다. 19세기 중반에는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충돌로 빚어진 이른바 `크림전쟁`의 무대였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오스만 제국, 영국, 프랑스와 충돌, 전쟁이 난 것이다.이 전쟁에서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나온다.또한 크림반도 한국과도 연관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연합국 정상들이 모여 종전 후 를 논의한 `얄타회담`이 열린 곳으로 당시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등이 크림반도 남부 휴양지인 얄타에 모여 독일 분할 점령을 비롯해 한반도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군정을 실시하는 신탁통치를 논의했다.
[매경닷컴 속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