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전통과 현대 2

3. 고대문화와 통치체계
불교
불교는 기원전 500년전 즈음 네팔의 남쪽에서 태어난 붓다에 의해 인도에서 발생 하여 전파된 종교이다. 인도-간다라-비단길(기원전1세기 ~1세기)-중국,한반도-일본열도로 전파된 경로가 하나 있고, 인도-실론(초기 불교 형식과 닮은)-동남아로 전파된 경로가 있다고 이야기 된다. 종교는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부파 불교에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며 계율을 중시하는 상좌부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융통적으로 경전을 해석하는 대중부로 나뉜다.

대승은 ‘큰 수레’라는 뜻으로,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중생을 피안(彼岸)의 세계로 날라다주는 큰 수레와 같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대승불교의 운동을 전개한 자들은 종래의 불교를 ‘소승’, 즉 ‘작은 수레’라 불러 그것이 출가승만을 위주로 한 편협한 불교임을 비난했다. 대승불교도들은 왕이나 부호의 지원 아래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출가승들의 안일한 삶과, 신도들의 물질적 공양에도 불구하고 자기자신들만의 정신적 평안만을 구하는 소극적·현세도피적인 경향에 반발하여,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濟度)할 것을 목표로 삼는 새로운 대중적 불교를 제창했다.. 대승불교도들은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하는 행동주의적 불교를 제창하고 나섰다. 이러한 대승의 이상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이 보살(菩薩)의 개념이다.

또한 기원 전후로 해서 개혁적 대승불교가 나타난다. 대승 불교는 그당시 일반적 불교형태의 개혁적 모습으로서 나타났다.대승불교는 이타행의 새로운 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사리와 부도 탑을 세우며, 초월자를 믿으며, (나무)아미타불의 서방정토신앙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개혁적인 대승 불교 이전의 초기 부파를 소승불교라 했고 자기해탈이나 출가자 중심으로 종교활동을 했다.

불교의 변용
기원전후 중국에 전래되어 귀족 지식인 사이의 신앙으로 자리잡았다. 위진 남북저 시기 불교경전을 한역 하였고, 불교를 중국의 색을 넣어 변용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유교적 색이 들어간 부모은중경이라는 불교 경전을 만들었다. 6세기 초 양나라에서 생겨난 선종은 불립문자,견성성불 즉 경론의 어구나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인 성을 보아 불이 된다는 개념을 기본으로 종교가 전재된다.
수당시대 불교가 융성하였고 유교의 쇠락과 불교의 흥성으로 수당 시대 중국 사상계를 특징지을 수 있다. 이에는 수 왕조와 당 왕조가 불교를 통해 민심을 모으고자 하는 정책적인 고려가 큰 기여를 했다. 예컨대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100여 곳이 넘는 사리탑을 세우게 했고, 당나라 고종은 도교 사찰인 도관과 함께 불교 사원을 세우는데 열심이었다. 이후 측천무후나 현종도 불교 사찰의 건립에 많은 공을 들였다. 수당 시대 불교의 융성은 유교의 지적, 사회적 영향력 감소라는 사상적인 요인 이외에도 이처럼 왕조의 불교 장려 정책이 그 중요한 요인이었다.
http://ask.nate.com/qna/view.html?n=3440610
불교는 호국 불교로써 자리 잡았는데 지배자가 부처의 환생이라는 지배자와 부처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지배 정당화 이념으로 사용하였다.

불승의 교류
불교가 융성하면서 불승들의 교류가 많이 있었는데 불승의 이동은 전파를 하는 쪽의 흐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전파된 국가의 불승들의 불교의 근원진를 찾아 길을 떠났었다. 그러면서 국경과 무관한 사상과 지식이 전파를 이뤄낸다. 한반도에 온 서역승려도 있어고, 신라승 의상, 혜초, 도의 가 중국 유학을 하기도 앴으며, 고구려 승인 혜자가 일본으로 포교를 갔고, 중국 승려인 감진또한 일본으로 포교 갔음이 기로으로 남아 있다. 일본 불승 원인 또한 불교의 근원을 찾아 중국 유학을 하기도 했다.

동아시아내 불교신앙의 공통점과 차이점
-아마티불(극락왕생), 약사여래(치유), 관세음보살(자비)
-사찰구조와 승려들의 생활양식
-전탑(중국),석탑(한국),목탑(일본)

#########유가사상########
기원전 551~479년 공자가 만든 유가사상은 사서오경(四書五經)에 잘 나타나며, 일상생활을 가족관계와 사회관계에서 고찰하는 실용적인 교의(敎義)로 구성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가사상 [儒家思想] (매일경제, 매경닷컴)

피세의 원칙으로 정명 인의 충서를 내새웠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예치 인정 덕치를 주장했다. 유교의 경전인 4서 5경은, 논어 맹자 중용 대학-예기의 일부와 시경(구전되었던 그 당시 사람들의 정서가 표현된) 서경 역경 예기 춘추로 이루어진다.

유교경전은 이록지학이라 하여, 교육과 관리 등용하는데 이용 되었고, 국가 제도와 사회 규범의 틀을 제공한다. 중국의 율렬체제는 이러한 유가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 졌다.

#########통치체계##########
중국은 진대부터 청대까지 율력국가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2000여년간 이어진 중국대륙의 율령체제는 당대 완성되었다고 말해진다. 그래서 20세기 청이 무너질 때 2천여년간 계속된 중국제국이 무너졌다라는 말도 나왔었다. 율령의 율은 황제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형률로서 유가사사이 기반이 된 신분차별적 적용의 특징이 나타나 있고 부계 중심의 가족 윤리가 기반이 된다. 령은 인민을 관리 통제하기 위한 행정법과 제도, 황실 관직, 균전제나 조용조를 포함한 토지와 조세징수의 행정적 정차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조용조란 세금 노역 특산물을 모두 이야기 하는 일정의 조세 형식을 의미하고, 균전제 신분 차별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안에서 땅을 공평하게 나누어 주어 세금을 걷는 제도를 의미한다. 균전제는 왕토왕민이라는 토지와 백성은 모두 천자의 것이라는 사상이 밑에 깔려 있다.
격은 칙령중 법률로 제정할 내용을 의미하여 개정법을 의미한다. 식을 율령격의 시행 세칙을 의미한다. 당나라 때 성립되어 동아시아 고대 문화의 완성의 한 모습이다. 서양에서 로마법이 근간이 되어 법 체계가 형성 된 것과 비슷한 것이다.

율령의 전파
당에서 완성한 율령체계는 동아시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글나 모든 나라들이 이러한 율령체계를 그대로 수용하기 보다 자신들의 나라 사정에 맞추어 변형하여 수용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유목지역의 경우는 여러부족이 모여 만들어진 경우가 많아 부족들이 동아가면서 왕을 맡는 식의 농경민의 통치용의 법과는 다른 유목족의 전통규칙이 적용 되었고 율령체제를 받아들이면서 단일 성이 왕우를 계승하는 것으로 정착하였다. 한반도는 고유제도 정비에 응용하였다. 한반도 안에서는 유목적 전통의 흔정도 발견 되며 통일 신라 때 만들어진 공품제도 같은 과거제 이외의 관품제도가 존재 하였다. 일본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율령체제국가였지만 실제 국가 운영에 적용했는지는 의문이 있다. 문서 기록에 따르면 부분적으로 시행했을 것이라고 추측 할 수 있고 율령체제의 근간에 존재하는 유가 기본 이념 또한 일본에서는 실현되었다고 보기 힘들다.

#########생산력의 발전과 지배층의 성격#######
10세기 ~16세기 초에 경제 발전이 이루어 졌다. 농본주의 사회에서의 경제발전은 경작방법의 증가나 경지면적의 증가가 기반이 된다. 이러한 경제발전과 잉여생산물의 증가는 인구를 증가시켰고 도시 시장 책 상업이 발전을 만들어내고 결국 사상의 발전을 이루어 내게 된다

농업구조의 변화
중국은 밭농사에서 논농사 중심으로 옮겨 가면서 그 수확량이 엄청나게 증가 했고 인구가 증가했으며, 송나라때 강남의 수전이 개간과  진나라(서진)을 통해 생활 양식을 그대로 많은 인구와 문화가 양자강 남쪽으로 내려옴으로써 이러한 농업혁명과 명대의 농겨지 확대는 농업구조를 변화 시킨다. 고려 조선 초기의 수리 관개시설을 확충하고 신전과 간척사업을 했다. 일본은 평야 지대를 개간하면서 농경지를 확대한다. 집약적 농업과 신품종의 도입, 중국 남북간 품종(쌀,보리,밀)의 교류가 일어났고, 다모작과 면화나 차같은 산업작물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백성을 가르치고 민생을 이롭 해야 한다는 유가의 사상에 따라 농상집요, 제민요술, 농사직설들의 농서의 책의 지필되었다.

추가
중국에서의 ‘중국민족’이란 인종적 차이에 의한 차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국역사 그 자체가 바로 중국민족의 형성과정을 뜻하는 것이고 이 과정(중국문화의 핵심 요소인 중국적 문화교육을 받아들이고 중국식으로 이름을 고치려 한다는 등)을 통해 이민족의 한족화가 이루어졌다. 이와같은 이유들로 중국 민족주의의 저변에는 오랜 중국의 역사 속에 녹아 있는 중국 문화주의가 그 원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지배적 견해이다. 다시 말해 근대 중국의 민족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중국 역사의 저변에 깔려 있는 중국의 문화주의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서양의 민족주의의 개념과는 확연히 차별을 이룬다.
http://www.jisikworld.co.kr/report/view.html?search_info=unity_report^1^1&dno=345012&vkwd=%C1%B6%B0%F8%C3%BC%C1%A6%28%F0%C8%CD%F8%F4%F7%F0%A4%29

########상공업과 도시############
상공업의 발달
중국
농업생산력 증가와 연동되어 상공업도 발정되었다. 잉여생산의 교환으로 인해 시장이 형성되었다. 시장이 형성되니 수요층이 생기고 싱장용 상업작물의 재배또한 증가했다. 면장직 도자기 제작이나 연료의 개발과 같은 공산품에 대한 수요도 증가했고 전국적 유통망과 화폐의 유통은 상공업 발달에 더 박차를 가할 수 있게 했다. 송대에는 지폐사용을 시작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철제 같은 중요 물품이 민중으로 들어가지 않게 관에서 전매사업을 한 물품이 있었는데, 이러한 관영 수공업 중심으로 상공업이 발달했다. 시장은 도시, 지방에 생김과 동시에 행상이 있었다.
일본의 시장은 절(신사)에 사람이 많이 모이기 대문에 신사 옆에서 시장이 형성 되었고, 지방 시장간 교환이 이루어 졌으며, 운송업도 발달하고, 동업자 조직의(명석을 깔고 판매하는 형식의)  강화와 지배층의 비호아래 상공업이 발달했다.
동아시아 국제 무역의 경우 송대에 현 무역 세관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시박사를 설치하고 이전까지는 조공책봉에 의한 무역이 많이 이루어 졌다면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통상을 통해 교루가 이루어 졌다. 원나라 시대에는(1271~1368년)에는 세계적 교역망이 구축 되기도 하였다. 14세기 중반 이후 왜구 출몰로 이러한 통상은 좀 위축되었다. 이렇게 활발하고 상공업적으로 큰 발전은 중국의 화폐가 국제적으로 유통 가능하게 만들었다.

도시의 발달
중국인구가 송대(960~1279)1억 돌파후 계속 증가하였다고 보여 진다. 북송의 개봉과 남송의 임안 두 중심 도시는 인구 1백만을 달성하지 않았었나 하는 주장도 있다. 조선 전기에(1392~)는 향약의 보급과 의술의 발달로 인구가 많이 증가하여 임진왜란 전 1천 4백만정도 있었지 않았나 하는 말이 있다. 군대 주둔 도시와 교통의 요충토시도 발달했다. 일본의 경우 대명(다이묘)이라고 하는 1만석 이상의 영지를 가진 지방 영주나 쇼군이 살고있는 성아래 형성된 성하정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했다.

############지배층의 변화##########
과거제도의 체택
과거제도는 수대(581~618)에 시작하여 송대(960~1279)정착 되었다. 중앙 귀족대신 중앙집권적 관료를 양성하기 위한 방법이고 요역 면제등 합격자에 대한 차별적 대우를 했다. 여우있는 신층 지주층의 관료화 기회로써 작용했으며, 유교경정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능력을 검증하는 시스템이었다.
고려(935~1392),조선(1392~1910)의 지배층
과거제도가 중국에서처럼 철저하게 시행 되지 못한다. 고려가 세워질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면 태조 왕건이 무력으로 지배력을 다진 경우여서 지방 호족세력을 결혼을 통해 묵어놓고 자손이 국가의 자리를 얻을수 있는 자격을 주는 음서제도를 통하여 (조상의 음덕) 공신들에게 이익을 보장해 주면서 통일을 했기 때문에 과거제도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세력에게 관료자리를 주는 과거제도를 중국만큼 시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통일을 위한 노력이 특정 집안의 권력이 너무 세서 부패와 반란의 악 순환을 만들어 내게 되어 고려 지배층의 분열을 가져온다. 그 과정에서 무신들이 천대 받게 되고, 참지 못하게 된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게 된다.

공민왕때 새로 생긴 신진사대부에 비해 권문세족은 대대로 높은 관직을 얻어 권력을 대물림하는 집안을 말하는데, 왕실의 종친, 고위 관료, 지방 관리등. 권문세족은 자신이 가진 권력의 힘으로 옳지 않은 방법으로 땅을 늘리고 거대한 농장을 가지고도 자신들의 특권을 이용해 세금을 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소수의 권세가들이 땅을 독차지 하고 횡포를 부리는 일은 고려말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신진 사대부는 고려말 부패한 권문세족을 비판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과거 시험을 통해 관리가 된 사람들이다. 신진 사대부 가운데 지방 향리 출신이 ㅁ낳았고, 대표적인 사람이 정도전, 조준, 정몽주 등이 있었다. 신진사대부는 집권 세력인 권문세력이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재산을 늘리는데 몰두하여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권문세력의 비리를 비판하고 백성들을 위하는 정치를 주장한다. 정도전, 조준 증은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잡은 이성계와 세력을 키우며 권문세족을 몰아내는 데 앞장 섰다. 이러한 권문세족에 대한 신진 사대부의 대립은 결국 와조의 교체를 야기한다.

급진 개혁파는 이성계와 결탁해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는데 성공한다. 따라서 급진 개혁파들이 조선 초기의 집권 세력이 되는 것이고, 이들이 훈구파가 된다. 한편 역성혁명에 마음으로 따를 수 없었던 온건 개혁파들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지방에 내려가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한다. 그들은 한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조선 중기 사화를 딛고 일어서는 사림파가 된다

같은 뿌리 다른 이상//유교를 기반으로 했지만 충에 대한 개념의 대립
조선역사의 실질적 훈구파는 태종의 왕의 지권에 도움을 준 공신들.

일본의 사무라이 지배
사무라이는 원래 시종,이며 기술직이었다. 일본은 과거제를 채택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일본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일본은 섬나라 이면서 지형이 평탄하지 않아 지역간 이동도 어렵고 인구도 많아서 서로 한정되 자원(빵)을 나눠 먹어야 하는 사회이다. 그리고 제한된 농경지로 지배층이 그렇게 여유롭지도 못했었다. 계층간의 이동보다는 계층을 명백하게 하고 그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미덕인 문화가 형성 되었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귀족 호위 집단에서 토착 지주세력으로 성장했는데, 천화세력의 약화와 무사집단의 전국화가 그 배경이다. 일본은 천황이 존재하지만 실제적인 통치자라기 보다 제상장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천황은 일본의 정체성과 정신적 중심이서 실제로 권력을 잡은 세력들은 천황을 물리치기 보다는 천황에게서 형식적인 인정을 통해 백성들의 지배자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취했다. 일본은 쇼군과 막부 중심의 정치체계가 형성된다.
막부는 원래 전시에 장군의 사령부가 되는 천막이다. 그런데 이러한 막부는 천황대신 절대 권력을 가진 장군의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어 버린다. 1192년 가마쿠라 막부의 우두머리가 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세이이 다이쇼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이래 역대 쇼군은 무신정권의 장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곧 막부의 주재자를 의미한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53518486&qb=7Ie86rWw6rO8IOunieu2gA==&enc=utf8&section=kin&rank=3&search_sort=0&spq=0&pid=R1QZcdpySDwssaEXLwCsssssssC-425832&sid=U1fEHQpyVlwAAFmuKbU
-약간의 일본역사

1192년 가마쿠라 막부가 막부(연합세력)로써 시작하였다 그러나 몽고족의 친입과 재정 부족으로 아시키가 막부로 넘어간다. 1500년대 전반기에서 후반기로 넘어가면서 전국 시대가 펼쳐지고 오다 놉나가가 통일의 기반을 다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결국 통일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을 주도한 인물이고 일본을 강하게 했다. 그는 일본내에서는 능력있는 지도자이며 새로운 체제를 만들려 한 사람이다. 통이 후 국내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밖으로 표출하는 동시에, 통일의 공신들에게 무언가 주어야 하는데 한정된 일본에서는 그 요구를 모두 충족하기 어려워서 조선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념적 지배##########
성리학의 성립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이르러 유학은 도덕 실천의 학으로서 크게 일어났으나,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큰 시련을 겪은 다음 한·당대(漢唐代)에는 경전(經典)을 수집·정리하고, 그 자구(字句)에 대한 주(注)와 해석을 주로 하는 소위 훈고학(訓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송·명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 노불(老佛) 사상을 가미하면서 이론적으로 심화되고 철학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리학 [性理學]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2540&cid=40942&categoryId=31445
유가, 유교는 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한 생활속에 실천 윤리의 학문이었다면 성리학은 이런 유교를 기반으로 한 철학이다. 동아시아는 이러한 유가사상을 바탕으로 백성을 마음으로 다스리는 것이 미덕이었으며 지향 되었었다. 이러한 정치를 왕도정치라 하고 패도 정치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한나라 시대의 무제의 스승이었던 동주서는 통치이념을 유가로부터 가져와 소개했다. 충성의 개념이나 충실히 자기 일 하게 하는 유가의 계층의식, 그리고 농본주의 따위의 유가의 개념을 한무제에게 가져왔다. 위진남북조와 수당시대에는 전체적으로 불교와 도교가 성행했다. 특히 당나라의 지배층에서는 도교가 성행 했었다. 송나라때 주희가 주자학, 송학, 성리학, 신유학, 정주학, 도학, 이학을 집대성 했다. 송대에는 이러한 사상적 발전이 많이 이루어 졌는데 반면 분에 빠져 약한 나라나를 소리도 듣는다. 송대에는 외부로 영역을 넓히기 보단 내부를 재정비하고 안정적인 문화적 발전을 이루어 냈다. 그러나 나중에 북쪽의 오랑캐가 강서해졌고 나중에 남송의 원인이 된다.

성리학의 이념
송대의인구가증가하고, 강남에 중심지가 생겨 사람이 모이고 생산력이 증가하고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지주층이 여우층이 유교 교양을 습득하게 되고 과거응시를 통해 관료가 되면서 사대부 지배층으로 형성된다.  신흥 지주층이 곧 유가경전을 독서할 여유가 많이 생기게 된다. 공부를 많이하니까 실제 생활 윤리보다 사람의 삶의 근복적 의미를 생각하면서 성리학이 발전하게 되었다.불교, 도교로부터 인식과 존재론적 이해 방법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유가 공부에 이용하면서 성리학은 발전하게 된다. 주돈의 무극이태극이나 이기론에는 이러한 인식과 존재론적 이해 방식을 읽을 수 있다.
성리학안에서 유학자의로써 학문의 수행방법은 격물치지, 거경궁리, 존천리거인욕로 나타내 진다. 격물지치는 물지을 자꾸 들여다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다는 뜻이고, 거경궁리는 경건한 곳에서 스스로를 경건하게 만들고 이치를 찾는다는 뜻이다. 존천리거인욕은 하늘의 이치는 인욕을 버리면 따라온단,ㄴ 뜻이다.
이러한 성리학의 공부 주체가 관리들이다 보니까 지배 이념으로써 자리 잡았는데 천지조화와 화이론, 신분제 사회질서 이념인 이일분수론에서 드러난다. 성리학에서 하늘의 조화는 즉 인간이 꼭 따라야 할 궁극적 목표였고 사늘이 정해준 신분제를 잘 따르는 것이 하늘의 조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설명함으로서 신분제 사회를 설득하고 통치체제에 봉건적 해석을 가미했다. 또한 전체 사회 윤리는 하나로 평등하나 동시에 각각으로 나뉘어 차별성을 지닌다는 이일분수론을 통해 신분제를 설명하기도 했다. 민본사상과 왕도정치 또한 성리학의 이념의 핵심적인 개념인데, 여기에서 민본은 지배자들이 백성을 뿌리로 알고 지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통치자의 입장에서 민중이 중요함을 설명하면서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성리학을 비판하는 이론들도 나왔는데, 심즉리의 양명학이나, 지합행일, 특히 양명학 좌파에서 나온다. 양명학의 기본 이론을 주장한 사람은 육돈의로 리는 사람의 마음이며, 지행일치를 주장했다. 성리학은 고민만 하지 행동에 중심을 둔 학문이 아니었기 때문에다. 양명학 좌파에서는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현재는 조화롭다는 전제를 비판하면서 조화롭지도 않은 사회에서 형식 논리만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현제는 조화롭지 않으니 고쳐야 하며, 고치는 행동이야 말로 참된것이라고 주장하며 참지식은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대의 실존주의 또는 하나의 방면으로는 큰 지식에 도달하는 것을 포기하는 면도있어서 허무주의와 비슷하기도 한다. 극단적인 예로 반란자가 잡혀 죽는 순간이 참지식을 이루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지역으로 확산
한반도
삼국 통일신라시대, 형식적으로 유학이 들어오긴 하나 불교 융성시기이다. 한당시대의 유학이 확산되던 시기고 불교와 조화를 이루었다. 고려시대는 정치사회적 윤리로서 민중의 생활과는 분리 되었엇다. 고려후기 이후 질서가 무너진 고려사회를 보고 개혁사상으로서 신흥 사대부 계층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래서 유학은 조선왕조의 지배이념으로 자리 잡게 된다. 중국, 일본, 베트남 지식인(연행사신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을 바탕으로 학문적 교류를 한다. 조선에서 두 성리학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황과 이이이다. 이황은 영남학파이면서 수기를 중요시 했고 관식에 나가지 않고 자기 수양을 중시하는 주리를 주장했다. 이이는 기호학파이면서 치인과 주기를 강조한 학자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중국에 유학한 불승들이 성리학을 도입한다. 다른 모든 이념이나 사상과 마찬가지로 일본적 색채를 가미하여 받아 들이게 되는데 인식론적 이해 보다는 실천적 접근을 하는 방향으로 받아들이다. 그당시 성리학은 동아시아 전체의 학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보편성 보다는 국가적 색채를 입혔다. 일본에서 성리학은 중심이념이라기 보다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사상들중 하나로 도입되었고, 과거제도에 이용하지 않고 사무라이 지식인의 교양과 수행에 이용하였다.

베트남의경우 10세기 이후 중국 사상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11세기 과거제를 시행하고, 국자감과 문묘(우리의 성균관과 같은)를 설치했짐나 불교적 전통을 유지한다. 15세기 초 유교 국가의 체제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북부지방에 강했고 조선 유학자와의 교류를 하고 전파했다.

###########전통시대 후기의 국제질서######
대전란 전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원나라는
몽골 세력의 지배함으로써 몽골세력을 북어주는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중국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으니까 다른 민족을 데리고 징세청부인으로  중국을 착취하였다. 그들은 색목인이라 불리며 이러한 색목인은 원나라의 교류나 상거래 능력이 얼마나 활발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세금 징수자가 부패할 경우 백성들은 엄청나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관리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원나라는 그러한 백성의 상태를 생각하기 보다 조세가 잘 들어오는 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것이 원나라가 100년을 못간 이유중 하나이다. 결국 한족의 농민 반란으로 명이 들어슨다. 명은 송나라 즉 성리학적 전통을 이어받으려 노력한다.
비슷한 시기에 고려도 내부적으로 갈등이 생긴다. 고려 말에는 원나라와 혈연적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다. 명나라가 통일 되면서 북원에 어떻게 태도를 취하는지 지식인들이 둘로 나뉘어 갈등 했다.

몽골 제국인 원(1271~1368)의 와해 후국제 정세를 살펴보자
중국은 명이 들어 섰고 안정되었으며, 조선 전기도 평화로웠다. 일본은 아시카가 막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갔으며, 몽골은 타타르,오이라트로 존재하고 오이라트는 여진과 함께 명에 위협을 끼칠만큼 세력이 커져가고 있었다. 명이 얼마나 안정되었는지 보여주는 예시로 정화의 서정사실이 있다. 정화는 이슬람 교도였는데 명나라 세울 때 큰 도움을 줘 중국식 성인 정을 받았다. 15세기 초 그리고 7번정도 큰함대를 이끌고 서정(서쪽을 정벌함. 그런데 공격적의미는 아님)한다. 가장 멀리는 아프리카나 케냐를 방문했다는 기록도 있다. 1~2만을 이끌고 서쪽으로 그렇게 간 이유는 명나라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함, 또는 명나라에 도전한느 외부세력을 견제하는 한 방법 또는 강대해지고 있는 주변국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국가들과 손 잡으려는 노력등 여러 추측들이 존재하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그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의 원칙은 사대 교린이었다. 중국에 사대하고 주변국가들과는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는 것을 의미한다. 농업생산력과 상공업이계속 발전했고 은이
유통되고 유출되었다.

세계적교역망이 형성된다.
스페인, 포트투칼 , 네덜란드 등의 동아시아의 진출, 그리고 동인도 회사를 통해 서양 세력이 동쪽으로 밀려 들어오는 서세동점이 나타난다. 그들은 동아시아와 서양 사이의 교역도 좋지만 동아시에 내에서도 교역 가능성을 발견하다. 그래서 동아시아 바다내에서 국제적 중계무역을 하기도 한다.

16세기 후반 명이 약화한다.
북쪽에는 여진이 강성해지고 남쪽에는 통제 되지 않는 왜구 극성을 부린다.

그 속에서 명은 약해진다.

*******25년 사이 4번의 큰 전쟁****** ->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큰 변화
#####임진(1592), 정유(1597) 전쟁 ######
동아시아의 국제 정쟁
한국의 입장에서는 왜란이 쳐들어온 전쟁이다. 중국에서는 항왜원조 왜구에 맞서 조선을 도운 전쟁  또는는 만력의 전으로 불린다.일본의 경우 문록경장의 역,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라 불린다. 정묘, 병자 전쟁의 한 원인으로 해석되고 있다.
임진왜란은 일본 통일 후 공신ㄷ르의 대우를 어떻게 해줄 것인가 그리고 전쟁의 기운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여나온 전쟁이다.  명을 쳐들어 갈테니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으나 조선이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여 침략하였다.  그 당시 조선은 명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들어 주 수 없는 요구를 한 것이다. 실리적 명분은 동아시아 해안과 교역을 장악하기 위함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왜군은 부산에서 한양까지 15일 만에 도착했으며 임금의 의주까지 피난가고 왕세자는 함경도 까지 피난 가는 큰 국환이였다. 그래도 이순신의 활약과 명나라 군사의 지원으로 평양에서 일본을 밀어낸다. 그러나 일본군은 울산~부산 지역이 왜성을 쌓아 놓는다. 그리고 회담을 하지만, 회담이 결렬되고 정유재란이 일어난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은 명나라에 재조지은의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국제 상황은 여진족이 힘을 얻고 명나라는 쇠약해저 가는 상황이었다. 여진족은 배후에서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서 조선을 회유한다. 조선의 공해군은 국제정세를 파악하여 명의 군세 요청에 군사를 보내긴 하지만 명분상의 군사 파견이었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친 명나라 파인 서인 세력이 인조반정(1623)을 일으킨다. 여진족에 적대적 방향이었고, 중국 침략의 위험 제거를 위해 후금이 쳐들어 오면서 정묘 전쟁이 일어난다.

정묘(1627) 병자(1636)전쟁
만주족인 여진 족이 흥하면서 후금을 건국한다. 그들은 몽골과 연맹을 맺고 명과 대치한다.  중국식 지배 제도와 팔기제도(혈연으로 시작된 군사 조직이 단체로 움직여 그 지역에 살면서 지배하는 방식으로 전투조직이 행정조직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생활 단위이면서 지배 단위이다) 를 활용한다.

-정묘전쟁의 결과
조선과 후금은 형제 지맹을 맺으면서 관계가 교린에서 사대로 바뀐다. 그러나 신하의 관계는 아니었다. 후금은 명에 대립하는 대청을 건국하고 중국의 전통속에 한 왕조로써 자리 잡으려 하였다. 조선은 계속된 전쟁 속에서 피폐해졌고, 그대 반대 일본에 대해서는 유화 정책을 썼기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의 안정화가 이루어 지는등 일본은 이득이 되었다. 그리고 한반도 내에 반일감정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컷지만 정묘전쟁으로 상대적으로 반일 감정이 줄어들어고, 이미 충분히 피폐한 한반도에 쓰시마를 이용해 일본은 한반도를 위협했다.
-병자전쟁의 결과
병자전쟁의 결과로 군신지맹의 관계를 맺는다. 남한 산성에서 인조임금이 절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청의 강력한 명령으로 조선과 명의 관계는 단절되었고 결국 1644년 청이 통일 한다. 일본은 역시나 반일감정의 상대화로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개선도었으나, 일본이 계속적으로 이미 피폐해진 한반도를 위협하여 경상도지역에 과도한 부담을 지웠다.

####### 대 전란의 영향 ###############
동아시아 지역 내 세력판도
청나라 초기의 주변 침략으로 현 중국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황제로써 백성들에게 인정받으러 노력한다. 화이관, 중화문화인식의 상대화를 만들어 청나라의 황제가 중국에 입장에서 오랑캐가 아니라 중화라 하는 보편적 문화를 지키기 위한 황제로써 자리 잡으려 노력했다. 한족이 중화문화를 지배하다가 화가 위기에 처했으므로 우리가 화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 시킬 것이니 중국의 지식인을 설득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만주족 언어 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청은 200여년간 안정적 통치를 헸고 만주족 300만이 전체 3억을 효율적으로 지배했다. 그 기반에는 팔기 제도가 존재하고 중국에 존재하던 엘리트들을 지배권으로 인정한 사실이 존재한다. 명나라 때는 겉으로는 쇄국정책을 펼쳣지만 서양 사람들에게 관대했다. 그들이 중국식으로 복장 언어, 의식 제례를 따른다면 관대하게 대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독교를 포교하려는 서양인들과 갈등이 생겨 쇄국 정책을 폈다. 그러나 기독교와 관계없는 나라들과는 교역을 인정했다.

이러한대 전란의 영향으로
중국은 북방 여진족에 의한 왕조 교체가 이루어 졌고 대 제국 판도가 바뀌었으며 화이관이 상대화 되었다. 200년가 안정적인 평화를 이루어 냈고, 제한적 쇄국 정책을 폈다.

한국은 전란으로 인한 사회질서가 변동 되었다. 명의론과 불벌론의 갈등이 있었고, 청으로 연행사 조공관계, 일본으로 통신사 일본의 요청 를 보내면서 교류를 했다. 북로남왜를 재인식 했고, 쇄국 정책을 폈다
한국은 마음으로 복종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조선안에서 명의론이 많이 있었으나 청나라에서 탄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명의론이 발전하여 불벌론이 대두 된다, 그러나 현실성은 떨어지는 의견이었다. 북로남왜는 명나라가 몽고족과 왜에 고통받으면서 나온 개념이었는데, 여진족과 두쿠가와 막부의 개념으로 재인식 되었다. 쇄국은 철저하게 했다. 조선에 들어오는 서양 선교사들이 적극적인 서교를 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 들이 수 없어 더 적극적이 쇄국정책을 폈다. 교역은 있었느나 관에서 통제 했다.

-일본 덕천막부와 막번 체제, 경제적 발전, 동아시아 지역내 교역권 확보, 막부의 국제적 정당성 회복, 쇄국-제한적
일본은 조선에 비해 전쟁의 피해가 적었다. 지방 분권과 중앙 집권이 적절하게 이루어 지고 있었으며 100여년간의 안정적이고 급속도로 발전하여 서양이 왓을 때 버틸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되었다. 쇄국을 하긴 했지만 정보나 교역이 있엇다.

다양한 교류
임진 정유 전쟁 : 저선에 투항한 왜군을 통해 조총이 도입하고 일본에 연행되어 간 조선인 들을 통해 도예 인쇄술 유학 및 농업 기술이 전파되어갔다. 약 7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나 확실치 않고 일본ㅇ로 간 조선인들 대부분은 노비가 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교류로 담배 고추등이 전래 되었으며 명나라 군사가 조선에 정착하는 경우 도 있었다.

정묘 병자전쟁의 결과로는 명유민이 조선과 일본으로 유입되어 갔으며, 명의 학술과 지식 물자가 청, 조선 도쿠가와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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