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전통과 현대 3

전통시대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 // 병자호란 이후

은화가 많이 등장해서 문제가 생기긱 시작한다. 미대륙의 은광의 발견과 세계적 교역 흐름이 박차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반 서민들은 아직 구리로 만등 동전을 사용했지만은이 태환으로써 국제 무역의 단위로써 은이 사용되었다.

인구증가
중국은 송대이후 1억이 초과하는가 싶더니 몽골의 침략으로 인구가 감소하여 명대 초기에는 약 8천만에서 청대 영토와 인구 얻으며 후기에는 의심스럽지만 4억까지 도달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엄청난 급증을 이루어 냈다. 명나라는 밖으로 뻗어 나가
지는 않았다. 침략도 거의 안했다. 명나라는 내부 안정에 힘을 썼으며 이 것은 어느정도 임진, 정유 전쟁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 된다. 명천 전환 시기에 중국 본토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명나라때 날씨는 좋은 데 분지가 많던 사천지역을 중심적으로 농지로 개간했고 만주지역에는 밀과 콩을 키웠다.
자급자족적 생활에서는 자연적 비료이외의 특정 비료를 쓰지 않았지만 갈수록 돈주고 사는 비료 사용이 늘었으며, 집약적 농업이 이루어 졌고 품종개량 특히 차 가 있었으며 감자 고구마 옥수수 같은 구황 작물을 키웠다.
1400년대 이후 기온의 증가도 인구 증가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한국은 대전란으로 인구가 천4백만에서 2~3백만 감소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18세기 중반 이후 회복기를 거치면서 19세기 후반 약 1천 6백만이 된다. 상남지역 충청 전라 경상 지방의 전란의 흔적을 회복하면서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기후변화와 농법 개량이 이루어 진다.

일본은 16~7세기 지역간 경쟁적 경지개발이 이루어 지고 19세기 후반 약 2.5배까지 경지 면적이 불어 난다. 도쿠가와 막부가 스고 안정이 되면서 인구 증가는 약 3배가 증가한다. 그러나 17세기말 ~ 19세기 중반까지는 정체된다. 여기에는 여러 추측이 존재한느데 생활 순준이 발전하여 그것을 유지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인구를 조절하게 되었다는 설과, 경제 발전은 많이 이루어 졌지만 빈부 격차가 엄청나게 커서 빈민들은 스스로의 식구를 늘릴려고 하지 않는 과정에서 인구가 정체 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일본 열도가 한정된 지역이기에 스스로 인구 조절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사회적 영향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엄청난 경제적 발전은 발전인지 착취인지 여러가지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도시화의 진행
중국
만리장성과 운화를 이용한 내지 경제가 발전했다. 명 중기 이후 하고 강남 및 운하주변에
중소 규모의 시장도시인 시진이 급증한다. 지역을 넘어서는 대도시가 형성 된다. 수도인 북경은 1백만 인구의 행정과 소비도시로써 자리 잡는다

한국은 17세기 이후 강가에 있는 포구 시장및 도시시장이 증가하고 조선 중기에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세금제도를 통해 조선 후기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화폐가 사용되고 쌀의 상품화가 나타난다. 안주, 의주, 동래가 국경 무역 도시로써 자리 잡고 18세기 중반에는 한양이 30만 중앙도시가 된다. 전주 상주 원주등 행정과 내륙 유통의 거점 도시가 되고, 도시민의 소비를 위한 외곽지역의 상품작물 재배가 이루어 진다.

일본의 경우 성하정을 이해 해야 한다.
도쿠가와 막부는 각지역의 자치권을 인정한다. 각 지역은 대명에 의해 지배되고 그 대명이나 쇼군이 사는 성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는데 그것을 성하정이라 한다.
은 17세기 이후 250개 이상의 행정도시인 성하정이 형성되고 소비및 공산품을 제작한다.해운유통과 창고로 쓰이는 항구 도시가 형성되고, 다이묘들이 정기적으로 쇼군이 있는 에도에서 살게 함으로써 그들을 견제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동에 의한  내륙 도로망이 발달하고 숙박할 수 있는 숙역도시가 발달했다. 에도는 18세기 말 1백만에 도달했고 오사카가 그것의 1/2, 교토가 2/3의 인구를 가지며 발달한다.

중국과 일본은 도시성경이 상당히 다른데
넓은 면적을 지배해야 하는 중국은 행정도시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했으며 도시사이의 간격이 크고 큰 도시의 개수는 적다. 그에 반면 일본은 여러 도시가 전지역에 걸쳐 균등하게 돈재하고 각 지역 안에서 원활한 경제가 형성된다. 성하정은 이러한 시스템 안에서 그 자체로 단결된 경제 단위를 형성하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 했다고 볼 수 있다.

############은의 화폐의 유통##########

콜롬버스의 발견에 따른 대항의 시대가 열렸고, 세계적으로 은광을 개발하였다. 은이 국제적 화페로서 이용되었다.
동아시에서도 마찬가지 였는데, 이전에는 중국의 동전이 동아시아의 국제 통화였다. 그러나 세계적인 교역이 늘어나면서 은이 국제 통화가 되었따. 16세기 이후 은의 유입되었고, 은납화까지 허용했다. 은은 스페인, 포르투칼, 네덜란드로 들어왔다. 역사속에서 은은 중국 왕조의 성쇠와 관련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은이 부족해진 서양은 아편을 중국에 들여 와 아편전쟁을 일으켰으니 말이다.

동아시아 화페

전통 중국의 화페는 일상 생활용 동전과 지폐 은이 존재했다. 은은 칭량 화폐이면서 장거리 대규모 거래용이었다. 중앙 정부에서 주조하지 않고 품질고 거래량에 따라 시장 가겨이 형성 되었다. 국가가 직접 통제하지 못했다. 넓은 중국대륙에서, 통제는 불가능이었다.

한국은 17세기 이후 대동법 시행 및 도시와 상업의 발달로 상평통보 동전이 보편화되었다.

일본은 지방정부와 군에서 쓰기위한 번찰이라는 화폐가 존재했고, 금은동 화를 주조해서 사용하였다. 상업의 발달에 따라 돈을 바꾸는 양체상이 생겼다. 국가에서 발행하는 은화는 은 비율을 줄인 화폐이기 때문에 국제 무역용 은화는 별도로 존재헀다.

교역망
한국과 중국
조공 책봉은 조공무역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무역 대표단을 끌고 다녔고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교역이 많았다. 조공품과 회사품 조공무역에 따른 부대 무역이 많았다. 일본 상인들은 한반도에 조공 부역을 부탁했고 중국 일본간의 국제 교역을 통해 조선 중개상들은 많은 이익을 얻게 된다.

한국과 일본
왜란 이후 교역이 활발해진다. 일본에 은이 유입되고, 동래에 일본인들의 임시 거주지연인 왜관을 만들어 준다. 완전히 폐쇄된 지역은 아니지만 제한적인 활동만 가능한 지역이었다. 형식적으로 조선은 대마도 상인에게만 교역을 허용했다. 일본의 요청으로 조선을 일본에 통신사를 12번 정도 보냈는데 일본이 접대도 잘해 주었지만 조선에서도 많은 비용을 썼다. 일본의 나가사키 항구에는 당인정이라고 하여 한국에서 일본  그리고 중국으로 물자를 팔면서 단순한 한일 간 교역 뿐 아니라 중국까지 포함시키 교역을 했다.

일본과 중국
중국의 해금 정책과 일본의 쇄국 정책으로 공부역은 쇠퇴했고, 사무역이 번성했다. 일본에 가 있는 중국상인이나 반대로 일본인이 중국에 머물기도 했다, 중국의 광동 무역 유지와 일본의 나가사키 무역 창구가 중심이 되어 교역 했다. 중국으로의 조공 부역도 있었다. 오키나와는 19세기 말 까지 일본 열도의 직접 지배를 받지 않았고 국제적으로 개방 되었 있었기 때문에 오키나와를 통한 국제 무역이 이루어 졌었다.
동남아를 통한 은과 비단의 교역도 있었다.

동남아 무역
중국인들이 동남아로 많이 내려가서 자신들의 시장을
확장했다. 명대 정화의 원정과 중국 시장권의 확장이 있었고 1600년대 전후 중국, 일본, 유럽 상인들의 활동 무대였다.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에 화교들이 집단적 이주를 하기도 했다. 베트남은 교육열이 강한등 화교가 자리 잡기 어려웠다. 말레이시아 싱카폴 인도내시아 필리핀은 화교들이 번성한다. 일본상인들도 일본의 전국시대 이주하고 도쿠가와 막부때 철저한 쇄국으로 인해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들이 일본인들의 마을을 형성한다. 나중에는 유럽인이 교역 주도권을 장악하고 식민지화한다.

###########독자적 전통과 문화의 수립 -전통시대 후기#########
성리학의 변화요인
중국 자체가 근원 문화라고 생각을 덜하게 되고, 스스로 역사의 정당성을 찾게 된다. 12세기 (남송) 주제에 이해 역설된 주자학은 자기 수양의 완성과 현실세계의 조화를 인정하는 절출적 성격을 기졌고,경과 의 , 내외의 겸섭,이전까지의 성리학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발전의 근거로 삼았다.
사회적 환경
생업과 사회환경의 다양화와 세계인식의 변화로 인해 성리학이 변화하였다

중국의 새로운 경향
경세치용

정치·경제·사회 등 국가사회의 현실적 문제를 다루는 제도와 방법에 관한 구체적 지식이나 실천적 구현을 포함하고 있는 용어. 본래 ‘경세’와 ‘치용’은 두 가지 개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세치용 [經世致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특히 청나라 초기나 조선 후기의 이른바 실학파에 관한 설명에서 일반적으로 쓰여지고 있다. 또한 경세치용은 실학파와 관련된 학문적 지식체계의 특정한 입장이나 방법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지만, 경세론과 치용론으로 분리하여 사용되는 경우와 그 의미를 구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세론 또는 경세학을 국가사회의 현실적 정치·경제·사회에 관한 학문적 이론이나 지식체계라 한다면, 그것은 실학파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고대사상에서부터 연원하는 기본적인 학문적 관심이며, 특히 유교사상의 기본적 과제이기도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세치용 [經世致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양명학의 고리 타분한 사상의 반방이 일어났다. 유학의 본월을 추구하고 실학적 경향이 나타난다. 명대 학술에 대한 반성과 비판으로 나타난다.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 세사람이 청나라 초기의 삼대 유로 3명의 큰 학자라고 불린다. 고증학이 나타나고 학문의 각 방면에 영향을 준다. 실증적 연구를 강조하다. 청말에는 공양학이 등장한다. 공양학은 우리시대에 맞는 주석서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서 나왔고 공자의 말을 주자가 해석한 대로만 해석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으로 부터나왔다.

대규모 편찬사업
청나라 초기에 반청사상이 존재 했다. 변발 같은 오랑캐 풍속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청나라에 강요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호습을 따르는 것에 반발했고 청나라를 중국의 정식 왕조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청 초기에 영향력 있는 학자 여유량과 증정은 청나라는 야만이이다라는 글을 썻고 여유량은 사형당하였다. 그래서 청나라의 제 5대 황제인 옹정제가 청나라 조정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1729년에 칙령으로 대의각미록이라는 책을 반포했다. 대의각미록에서는 한이 어떻게 한나라의 문화라고 생각하는지, 대륙의 중화문화이며, 한 문화의 보편적 가치를 생각하면 청을 섬겨야 한다. 그리해서 한 문화를 더 잘 발전시킬 수 있다고 타이르듯이 이야기 한 책이다. 중화문화이념의 확대를 보여준다.
청은 학자들에게 관심을 가졌고 중국의 전래서적의 편찬을 맡겼다. 옥편 같은 역활을 했던 강희자전이나 도서 컬렉션인 고금도서집성
전통 서정의 서적의 분류기중으로 네개의 책 보관 창고를 만들어 책을 분류했다. :사고전서 :경사문집
학자들이 먹고 살고 할일을 주므로써 오랑캐라는 비난이 줄었다.

서양에 대한 관심과 서학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에서 들어온 서양 학문을 북학이라고 불렀다. 청나라때 중국에 들어온 실질적 학문이다.서학은 진짜 서양의 학문이다. 서양은 인지학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민을 했는데 , 주자학은 인지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고민을 했다. 서양을 과학기술을 들여오면서 괴리가 생겼다.

#########대전란 이후 조선의 지식사회######
예햑이 융성했다.
사람은 왜 의 선을 찾아가는가? 라는 질문에 유교적인 답은 그것이 하늘고 닿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법을 지키고 약속을 지키는 것에 대한 이유를 하늘의 뜻, 즉 천도라고 여겼으며 예는 천도를 따라가기 위한 실제 생활 규범이었다. 유교 국가 정치의 기본 틀인 예치는 예송으로 발전 했고, 성리학은 심화 되었다. 예송논쟁과 더불어 정치적 노선 차이가 들어 났고 신권이 강화되었다.(임금의 자유가 없던 시절이다,, 사관이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하는등) 대 전란 이후 국정 회복을 위한 비판이 많았다. 당쟁은 이전에는 소비적인 대툼이라고 여져졌으나, 당쟁으로 인한 정권교체는 고인물을 흐르게 하고 서로를 비판함으로써 더 좋은 의견을 찾아가는 방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 논쟁은 조선왕실을 뒤집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 졌다. 이러한 당재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을때 신민사관(일본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로써 이용했다.

중국의 고증학 같은 실증적 학문이 등장한다. 유가 사상의 본질에 대한 문의가 생겨 났으며,국제관,서민생화, 정치같은 구체적인 현실에 관심가지기 시작한다. 동시에 한국의 독자성에 대한 탐구도 나타난다. 실증적인 것들을 생각하면서 발해를 재조명하는 등 중국이 이미족에 넘어가고 조선학자들의 자부심이 높아지면서 중국에 종속되지 않은 것들을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실학의 전개
북학 계열은 중국을 통한 신지식의 습득을 중요시 여기고 화이론을 극복하자는 입장을 표명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홍대용, 박제가, 박지원이 있다.
남인계열은 농촌문제게 관심이 많았고 관료제의 모순에 주목했다. 유형원가 이익이 여기 포함된다.  남인은 세력을 잃은 집단이긴 했지만  실학의 주류세력이었다.
소론계열은 양명학의 재해석이나 이용후생과 부국안민에 중점을 두었다. 박세당 정제두 유수원이 여기 포함된다.
정약용은 실학을 집대성 했다.
최한기는 전통탁피적 기학을 했다. 경험론에 입각한 서양과학을 접목을 시도 했다.기를 강조하여 보이는 현상을 탐구하려 했다.

도쿠가와 일본의 지식인
막부의 교학으로서의 주자학
일본은 조선을 갔다온 불교승려를 통해서 유학, 주자학이 전래되었다. 히야시 라잔이라는 지도자는 우리도 이념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으며, 교학으로 주자학을 받아들였다.통치의 명분과 논리가 원래는 수기가 치인보다 더 상위 단계지만 일본에서 받아들이기는 치인을 더 중요시 하는 방향으로 받아들였다. 동아시아 보편이념과 연계되었고, 같은 학문을 통해 조선 통신사와의 교류도 했다.
고학
공자 맹자의 본 뜻을 추구하려는 고의학이 있었고, 그들만의 고대 선왕의 길을 연구하는 고학이 존재했다.
국학이라 하여 일본의 원형을 모색하는고증학적 방법의 학문이 존재했다.
고도론은 국가주의의 이념에 기초한다.  고도론은 양명학과 불교가 들어오기 전 그시절에도 천황이 있었고 고대 설화로만 여기지 말고 천황을 모시고 살던 일본을 이상사회로 보는 천화아래 계급도 없고 신분도 없는 국수주의자에게 잘 받아들여 졌고 많은 수가 공상주의가 되엇따.
양명학은 실천중심으로 일본적 변용이 이루어졌고, 정신적인 것 보다 행동을 해야한다는 양명학은 사무라이 정신에 적용되었다.
일본은 여러가지 사상이 공존하며 사상의 융통성이 좋고 폭이 넓다.
난학은 양학이라고 부르며 네덜란드를 통한 서양 지식의 수입이 있엇다. 근대 과학 지식을 의미한다.
일본의 실학은 진짜 실용학문이다.

베트남의 동아시아적 전통문화
15세기 중반이후 레 왕조가 들어서 태학과 과거제도가 시행되는 등 유가적 질서가 실행되는 모습을 보였으나 진짜 실시 되었는지는 의심스럽다.율령 법전이 편찬되고 국조형률이 있었다. 유학의 학문적 발전은 미약했다. 지역 문화의 힘이 너무 컸다고 생각된다.
19세기 응우옌 완조는 약 150년간 존재했고 1884년 이후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다. 프랑스에 조공을 했으나, 내부에서는 황제칭호를 사용하고 독자 연호를 사용하여 소천하의식을 드러낸다. 중국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간섭하지 않았다. 유가적 통치와 교육을 강조했고 조선의 학문 특히 실학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높았다.
베트남과의 한국의 교류는 통신사에 한정되지 않는다. 베트남의 왕자가 한국(고려)에 귀하한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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