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전통과 현대 4

  1. 개항과 침략의 과정

– 서양의 충격과 동아시아내의 갈등

동아시아의 근대시대의 시작은 개항을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전통시대 후기 동아시아 사회의 모습을 보자면, 대체적으로 해금과 쇄국을 하고 있었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슬슬 접근 해 오고 있는 서양 세력에 대항하여 국가 통제하에 있는 교역만을 허가 했다. 그 대표적인 모습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공책봉의 무역이 존재 했으며, 국경지역끼리 교역하는 호시가 존재 했다. 이념과 형태적으로는 쇄국을 표방했지만 중국의 광동 지역에서는 영국과 교역했으며, 일본 나가사키에서는 네덜란드나 동인도 회사와 교역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여기서도 빈틈이 있던 것이, 특정 국가와 교역한다고 해서 특정 나라 사람들만 교역한 것은 아니었다. 그 교역국을 통해 들어오는 수 많은 나라 상인들이 있었고, 실질적으로 여러 나라와 교역하고 있었다. 아주 제한 적이지만 그러한 교역을 통해 서양의 사회를 보고 있었다. 일본 같은 경우는 서양에 대한 관심이 좀더 일찍 생겼으며, 그 정도가 커서, 막부는 나가사키에 오는 상인에게 서양 사회에 대한 보고서를 요구하기도 했다. 통역관들이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동아시아 국가 내부의 사회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동아시아 내부에서는 조직화되고 안정화된 교역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은 동시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치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 도 있다. 수공업적 경제 발전이 한계에 다다르고, 공장제 수공업의 모습이 나타났다. (Economic Equilibrium) 생산 수단이나 교역 수단의 변화가 필요했다고 볼 수 도 있다.

18세기 후반 유럽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성장한 서양세계의 시장은 동아시아까지 그 세력을 떨쳤다. 생산성 높은 면직물을 앞세워 그들의 시장 속에 동아시아가 들어오도록 노력했다. 그에 반해 동아시아는 아직 산업적인 면에서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서양 시장에 대해 경쟁력이 없어서, 이전까지의 동아시아 주도의 교역과는 달리, 서양 세력이 경제적 우위를 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고, 면화 재배를 시켜 싼 값에 원료를 얻을 수 있었으며, 산업혁명으로 가능해진 싼 면직물을 생산하여 세계시장에 팔았다. 또 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자신들의 식민지를 늘려가며 노예무역이나, 은광을 통해 세계시장에서 큰 이익을 얻고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의 서양의 모습을 서양의 입장에서 좀 더 살펴보자면, 산업혁명으로 인한 군사력의 비약적인 발전이 나타났다. 위에서 인도를 이용하는 방법에서 나타나듯이 군사적으로 다른 나라들을 제압하여 원료공급지로써 이용하고, 그 원료로 싼 비용을 들여 공정한 다음 다시 그 식민지들에 비싸게 파는 2중 착취를 행하였다. 식민지처럼 완전하게 정복한 것은 아니지만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포함외교’을 실시했다.

분쟁 당사국의 한쪽이 자기의 요구를 관철하기위하여 다른 나라에 함대를 파견하여 압력을 가함으로써 상대방으로부터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려는 외교수단.

[네이버 지식백과] 포함외교 [gunboat diplomacy, 砲艦外交] (두산백과)

일본의 경우에도 포함외교의 굴복했다고 말해 지는데, 직접적인 전쟁이나 압력은 없었지만, 네덜란드로부터 중국이 서양에 항복하였다는 정보를 얻고 10년간 긴장했었다. 이 긴장시기에 일본은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세계 흐름에 미리 대비하고, 준비했다. 서양은 소비시장으로써 세계시장을 계속 확보해 나간다. 그리고 근대국민국가의 모습을 갖춰가는 과정을 거친다.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국가 형태가 입헌제도를 기반으로 재 정립되는 등 공식적인 제도가 형성 되었다. 강해지는 국력과 시민 혁명으로 시민의식이 생성 되면서, 개인은 나라를 자신이 지킬만한 대상으로 인식이 아직 이론적이기 하지만 생성되고 있었다. 자기 나라를 더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열망도 포함되어 국가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인식하는 근대 시민으로 나가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아직 이러한 이념이 이단으로 취급되던 시기였다.

서양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동등한 권리가 있다는 자연법 사상이 자리 잡았는데 그 개념을 국가 관계에도 적용시켰다. 모든 나라는 동등한 권리가 있다는 국제법 질서를 형성했다. 그 당시 동아시아는 중국 중심의 어느 정도 상하를 인정하고, 외부 다른 나라의 관계에서는 독립적인 조공책봉이라는 국제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중화문화 중심의 조공책봉의 국제 질서와 서양이 주장한 국제법 질서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국제법은 겉으로는 평등 사상을 내세우고 있지만, 자본주의 국가의 착취 방법일 뿐이었다. 이미 강한 국가였던 유럽은 약한 국가들에게 그 경제력과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평등을 내세워 서로 꼭 지켜야 할 약속의 개념인 조약을 맺게 했다.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서양 세력은 조약을 통해 불평등한 국제 질서를 형성했다.

–       강요된 개항

해금 정책을 시행중인 청에서 유일하게 해외와 무역이 가능했던 광둥지역에서는 자신들 스스로 관세를 매기고 무역을 감시하고 제한 했다. 서양의 강대국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물품들의 소비 시장으로써 중국을 장악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서양의 가장 대표적인 상품이었던 면직물은 중국 내에서 생산되는 값싸고 질 좋은 면직물에 대해서 경쟁력이 약했으며, 워낙 넓은 땅을 가지고 있던 중국 이라서 내륙 시장까지 침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자신들의 물건을 팔아서 얻는 수익보다, 서양 소비시장은 중국의 물품들을 더 많이 요구 했으며 서양 입장에서 수출보다 수입이 훨씬 많았다. 대표적인 수입 품으로는 차, 도자기가 있었다. 멕시코의 은광도 한계를 보이고, 중국으로의 은 유출량이 너무 많아지자, 영국은 인도에서 아편을 키워 중국에 밀 수출하기에 이른다. 영국은 인도에 면직물을 수출하고, 인도는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고 그렇게 얻은 이익으로 영국은 중국에 차와 도자기를 수입하는 이러한 ‘삼각무역’이 생겨났다. 아편의 수출로 상당한 양의 은이 중국을 빠져나가 영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당시 아편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의 마약은 아니었다.  담배 같은 개념? ) 이에 위기감을 느낀 중국은 아편에 대한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1839년 엄금론자 린쩌쉬가 흠차대신으로 임명되면서 대대적인 아편금지 정책을 펼친다. 영국인이 중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린쩌쉬는 마카오를 봉쇄한 후, 영국 기를 달고 있던 배에 있던 약 1200톤을 태워버린다. 그 나라의 기를 달고 있었다면 그 나라의 영토로 취급하는데 영국은 그것을 빌미로 자신들의 영토에 무단으로 침입한 점과, 태워버린 아편의 보상을 빌미로 중국을 침략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1840년 아편전쟁이다. 이 아편전쟁은 유럽 열강의 동아시아 지역으로의 진출의 시발점이 되었다. 제 1차 중영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이 전쟁의 결과로 영국과 청은 남경조약을 맺게 된다. 남경조약은 홍콩이 완전히 영국의 영토가 되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단, 99년간 동안 조차한다고 명시하여 언젠가는 돌려준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홍콩에 영국인이 살기 시작하면 물품이 필요한데 홍콩 안에서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 다는 구실로 구령반도도 영국이 차지하였다.

이러한 국제적 상황이 일본에게는 정확하게 기록된 문서로 전달 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영국으로써는 아직 일본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일본은 국제 정치 세력 갈등 공백기를 적절한 정보를 바탕으로 잘 활용 했음이 이후에 드러난다. 1853년 7월 우라가 앞바다에서 해군 제독 페리는 개항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했고 그 결과 미일화친조약을 맺는다.

이 시기 베트남의 상황을 보자. 프랑스는 세계적으로 제국적인 식민지를 확장해 나갔던 나폴레옹 3세 제국의 시대를 누리고 있었다. 영국이 중영전쟁을 일으키고, 남경조약을 채결하는 등 동아시아로 그 세력을 넓히자 프랑스도 자극을 받아 중국으로 진출하려는 마음을 키웠다. 그 기점으로 베트남을 차지 하려 했고, 결국 베트남은 왕조가 존재하고 법적으로 식민지를 명시한 적은 없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의 식민지 국가가 되었다.

조선은 척화의식이 강했던 고종즉위 때, 외부의 세력을 물리친 경험이 있었다. 조선을 개항시키지 못한 나라들은 직접적으로 노력하기 보다 이미 개항한 일본을 이용했다. 일본이 개항을 시키면 이익을 취하겠다는 생각으로 일본의 조선침략을 지원했다. 일본은 측량을 구실로 군함 운요호를 강화도 들여 놓고 조선을 도발했다. 그리고는 군 국기를 달고 있는 배가 조선으로부터 공격을 당하였다는 명분을 가지고 조선을 침략한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은 조일수호조규를 맺는다. 조선에서는 동아시아 내부 규약의 연장이며 확대의 의미로 받아들였으나, 일본에서는 서양식의 규약이라는 의미로 조약을 맺었다. 일본 – 조선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 내용에는 두 나라가 동의해야 관세를 바꿀 수 있는 협정관세율조약이 있었고, 이것은 곧 관세자 주권이 상실 되었음을 의미한다. 에를 들어 경쟁력 없는 상품을 재배하는 농민을 국가 입장에서 보호해야 하는데, 외국에서 들여오는 물품에 관세를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 하면, 우리 농민을 보호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조약에는 군사적 압박이 존재하기 때문에 깰 수가 없었다.

–       불평등조약체제의 문제점

새로운 국제적 질서가 나타나고, 힘을 가진 나라들은 힘이 없는 나라들과 불평등 조약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다. 불평등 조약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관세자주권의 상실, 치외법권의 인정, 최혜국 조항의 자동화. 이러한 불평등조약체제는 이미 그 경쟁력을 확보하고, 군사력으로 다른 국가에게 압박을 줄 술 수 있는 질서가 성립된 세계 자본주의 시장 속으로 약한 국가들을 끌어들였다. 동아시아도 대부분 그에 따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시장은 붕괴되었고 갑작스러운 변화에 불만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이전까지의 질서와 타협하지 못하던 사람들과 새로운 흐름에 타협하는 사람들간에 계속된 갈등이 발생했다.

치외법권의 조항은 일반적으로 열강이 그 지역에서의 권력을 얻어 그 국가의 주권을 침해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조금 다른 의미로 해석 하기도 하는데, 그 시대상을 고려하면 수많은 나라가 서로 그 존재를 알게 되고 교류하게 되었지만 서로 이해 하지 못하는 문화가 많이 존재했고 다른 방식의 예절로 인해 갈등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시대상이었다. 예를 들면 일본의 다이묘가 지나가면 모리를 숙이는 것일 일본의 필수적인 생활 예절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서양인이 다이묘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국민은 자신들의 법으로 처리 해야 했다. 또 다른 치외법권이라 함은 정치적인 권력을 넘어서, 서양 열강은 동아시아를 야만국으로 여겨 그 법을 다를 수 없다는 서양의 우월 주의에 기반을 둔다.

최혜국조약의 자동화 조항의 의미는 이전에 외교조약을 한 나라들과의 조약을, 이후에 조약 수준에 따라 자동적으로 그 범위와 권리가 확장됨을 의히만다.

불평등 조약에 따라 중국시장을 먹기 위한 여러 나라의 협력을 촉구함으로써 세계 자본주의 시장 속으로 열강 이외의 국가들을 끌어들이고,

동아시아의 시장 붕괴는 불평등 조약의 핵심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국가 내부의 갈등 심화와 폭발 계기가 된다.

중국은 개항 이후 내수 시장이 붕괴 되었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국 사회는 혼란했다. 서양 국가들이 조약을 맺고 믿지를 못하여 자신들의 나라 사람을 파견한다. 중국은 외국인을 억지로 공무원(고빙)으로 채용해야 했고, 그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국가 또는 스스로의 이권을 챙겼다.  1851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홍수전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예수님의 형이라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넓은 지역에 걸쳐 포교했다. 이러한 반란 비슷한 세력이 외국인들, 자신들의 이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였다. 외세의 연합 무력진압으로 인해 태평천국의 난은 끝을 내렸다.

1856년 애로호 사건이라 불리는 2차 중영전쟁이 일어난다. 영국기를 단 배가 밀수품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발견한 중국은 밀수핌을 태워버린다. 그리고 이 상이 청나라가 영국과 맺은 조약을 잘 지키지 않으려고 했었다.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청나라를 공격하는 구실이 되어 군사력으로 압박한다. 청나라는 조약이 불리해지면서도 계속 맺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부 사정도 좋지 않았지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 청의 힘은 약해져만 갔으나 청 왕조를 확실하게 무너트릴 만한 대체 권력이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청 왕조는 서양 열강에 대해서는 굴욕하고 불평등 조약을 맺으면서도 동아시아 내에서는 주변국에 조공체제를 계속 요구한다.

초기에 일본은 서양 강대국들의 관심을 적게 받았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으로 나아갈 통로로써 일본을 주시했고 나중에는 시장으로써 가치도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을 개항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일본을 식민지화 하려는 욕심까지는 없었다. 영국은 이미 식민지가 많았고, 그것들을 통제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 시기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정치적 군사적 부담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영국과 대립 관계였던 프랑스는 중국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에 관심을 가졌다. 시대적으로 일본이 열강의 침략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으로는 크리미아 반도 전쟁을 원인으로 둘 수 있다.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나가는 거점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본에 관심은 많은데 지형적, 군사적으로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었다. 이 시기에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혼란이 존재 했다.

생활적 어려움을 ‘양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일본에 형성 되었고, 서양 세력과 교류하는 막부는 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천황을 지키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존양왕이 사상이 대두 되면서 막부는 천황에 위임 받은 것이기 때문에 막부가 그렇게 막 외부와 조약을 맺으면 안 된다는 내부 분위기가 형성 되었다. 존왕양이 사상은 막부를 타도 하지는 도막운동으로 이어졌고 그 주체 또한 사무라이에서 일반 서민으로 확대 되었다. 더 나아가 일본 내 전통적인 세력 확장의 의식이 다시 부상했고, 서양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서양에 새로운 관심 또한 가지게 되었다. 1871년 청나라와 일본은 근대적 대등국 관계에서 청일수호조규를 맺는다.

베트남은 중국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지는 않지만 간섭이 아주 없지도 않은 나라였다. 프랑스가 베트남으로 진출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자 중국은 베트남에 상국 입장을 취하면서 프랑스를 견제했다. 프랑스와 베트남의 불평등 조약이었던 사이공 조약으로 주권을 부분적으로 상실 하였고 제 2차 사이공 조약(1874년)으로 코친차이나 지역을 프랑스가 직접 통치한다.

1840년 대 중국의 굴욕적인 조약은 동아시아 질서가 급변하고 있음을 의미했지만 우리나라는 그정보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대비하지 못했다. 서양에 대한 정보들은 거의 청나라의 눈으로 기록된 것을 북학자들이 들여오는 방식의 간접 정보들이었으며 자기들의 약점을 조선에 알리고 싶지 않았던 청나라는 서양을 잘 물리친 듯한 정보를 조선에 전달했던 것이다. 조선은 아직도 중화질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위정척사라 하여 청의 전통적 동아시아 질서인 성리학적 보편이념을 옹호하고 서양과 일본을 오랑캐로 여겨 물리 쳐야 할 존재로 여겼다. 지식인들은 유가, 성리학적 통치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보다 먼저 세계 정세를 파악한 일본은 조선을 침략의 타켓으로 잡고, 자신들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중요한 지역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한국을 정복해야 한다는 정한론과 한국을 정벌하려 하면 다른 열강에 대해 취약해지기 때문에 한국을 정벌에 소극적인 세력간의 갈등이 생겼다. 한국의 개화파는 조금 일찍 개화한 일본을 보며 일본에게 배워야 할 것은 배워야 서양 열강들 사이에서 독립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기본으로 일본은 조선의 개화운동을 기원했다. 그러나 이때의 개화파는 개화에 가장 가까운 예시로 일본이 있었던 것이지 친일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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