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전통과 현대 5

  1. 자강운동과 국제관계

– 근대 국민국가를 향하여

근대국민국가(nation state)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춘 국가를 의미한다. 먼저 대외적으로 국가 주권이 확립되어야 한다.(대외저항력) 국민 스스로에 의해 통치(주권)가 되는 자주 독립 국가여야 한다. 나라가 합리적으로 통치 되고 있으며, 나라 구석구석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통치 방식이 있어야 한다. 막스베버는 근대 국가의 조건을 관료제적 합리성 이라로 보았다. 시민 혁명 이후 고시 제도가 나타났고 성격에 똑똑한 사람이 국가를 운영하게 하는 합리적 방식에 의해 국가가 운영 되게 한다. 대내적으로 통일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농민이나 아무나 훈련하여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닌 국가를 방어 하기 위한 상비군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패배에 따른 비용보다 적게 들어 국가 운영을 효율적으로 하는데 도움을 준다. 주권자가 명확해야 한다. 법안에서 국민들이 평등한 주권자로써 존재해야 한다. (입헌정치) 그 결과로 국가의 틀 안에서 개인의 권리가 커지므로 세금, 병역을 국민으로써 부과되는 것이다. ‘문화민족’의 ‘국가민족’화가 나타나야 한다. 같은 언어, 같은 역사, 같은 생활방식을 공유하여야 한다. 산업화된 사회여야 한다. 농업화 사회에서는 국가가 필요 없는 자급 자족적 사회가 가능하다. 조금 발정되어 상업이 나타나고 중상주의가 나타난다. 그러나 상업도 어느 한계치가 오면 더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된다. 이 과정을 사업화로 인해 기계가 나타나고, 공장업의 합리성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금융자본이 만들어진다. 이 발전을 목표로 해서 자강운동이 나타난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자강운동이 성공했다고 말해진다. 중국의 아편전쟁의 결과를 반면교사 삼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 진다. 일본은 국민통합과 국력의 집결을 가능케 함으로써 초기의 성공을 이루어 낸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타도는 계속 논해지고 천황의 존속이 그 목표로 자리잡는다. 근대국민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서양에서처럼 국민 의식을 빨리 갖추길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그것을 대체한 것이 천황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일본의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은 위로부터의 개혁이 중심이 되었고 천황제에 의한 천황을 중심으로 국민 통합이 이루어 진다. 일본의 사무라이 지배층은 사실 전통적인 지배층이기 때문에 막부와 같이 원칙적으로는 타도 되어야 할 대상이었지만 그들은 국가 체제 변화에 순을 했다. 이것은 조선이나 중국과 달리 전통적으로 토지와 분리된 지배 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우리나라나 중국 같은 경우 양반들이 토지를 소유하고 관직을 안 해도 다 먹고 살 수 있었고 토지소유는 지배층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어있었다. 사무라이들의 총, 칼을 집단적으로 회수하고 성하정에 살도록 했다. 문반 양반 역할을 맡겼으며 상비군 같이 훈련만 했다. 이들은 이후 관리로 자리 잡는다. 일본의 전통적인 토지 지배 체계는 천황이 막부에게 막부가 다이묘에게, 다이묘가 사무라이에게 토지를 위임해 준 것이기 때문에 일 안 하면서도 세금으로 봉록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 가진 땅은 없었다.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서서히 사무라이 계급을 근대국가체제 제안에 흡수 시키고 국가가 토지를 회수하고, 관록은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의 명치 정부에서 보장했다. 이로 인해 사무라이 계층은 반발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국가 예산의 1/3이 사무라이의 녹봉이었던 만큼 그들을 흡수 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잘 드러나고, 사실 그것을 직접 주기는 어려우니까 채권으로 녹봉을 주었다. 이러한 채권은 근대국가 형성의 초기 자금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렇게 근대 국가의 인프라를 형성했다. 국민들에게는 천황의 존재로 인해 막부의 교체가 부담스럽지 않았다. 일본 국민은 기본적으로 신민 의식 즉, 전황의 백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가장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영국이 중국을 통제하는데 지쳐 있었고, 유럽은 많은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고 미국은 남북전쟁 주이어서 권력 공백시기가 존재했으며 그로 인해 외국의 압력을 받지 않고 근대화 할 수 있었다.

이 자강운동의 경우 지배층의 노력이 주를 이루었는데, 의무 교육을 먼저 시행하고, 그들은 목표와 수단을 명확히 했다. 자주독립이라는 목표아래 불평등한 조약을 개정하고 문영을 개화 한다. 산업 자본주의를 일으키기 위해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키는 식산흥업을 추구한다. 아직 스스로가 반 문명국이라 생각하여 빨리 야만적이라 생각하는 점을 버리려 노력한다. 해외에서 법을 배워와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만든다. 단,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이 헌법과 의회를 만드는 기본 사상에는 천황제가 있었음을 볼 수 있는데 헌법의 제 1조는 모든 통치권은 천황에게 있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의회는 일본을 만들어 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과 천황이 임명 가능한 총리가 중심이 된다. 서양이 아닌 국가로써는 가장 빨리 근대국가가 되었다.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나서 왜 졌는가에 대한 지식인들의 토론이 활발하게 나타났다. ‘임칙서’와 같은 계열의 사람으로 써 ‘위원’은 <해국도지>라는 책을 집필했고, 이 책에서는 바다 건너 나라들에 대한 상당히 자세하게 주변 국가들에 대한 설명이 나타난다. 지식인들과 정부는 당연하게 세계에 대한 관심이 증가 했고 서양 것을 배우는데 힘쓰자는 양무 운동이 일어 난다. 그러나 중국은 아직 자존심이 있어서 기술은 서양 것을 따르되 그 사상을 중국 것을 지키자는 중체서용의 한계를 아직 가지고 있었다. 외세를 받아들이긴 하지만 중국을 바꾸는 결과로 이어지지 는 못한다. 약해져 가는 청 황실(만주족)에 대하여 중국민(한족)은 중국을 지키지 못했다는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지배층은 여전히 전통에 집착하려는 성격을 바꾸지 않고 개방 개혁에 소극적이었다. 양무 운동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세계를 알아가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채, 그리고 기본적 국가 시스템을 전통적으로 유지한 채로 대외자립을 위한 변법자강 운동이 나타난다. 국민들 또한 서양 근대국가에 비해 자신들의 나라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중국의 대표자들은 그들을 통합하고 뜻을 모으기 보다 권위적으로 지배했다. 초기에는 청나라가 변법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억제한다. 변법자강운동이 유교사상의 틀로 이루어진 청나라의 틀을 바꾼다고 본 것이다.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고 형식적으로 중국이 상국이었다. 그리고 서양과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이러한 조약을 청나라는 반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청나라 스스로도 외세에 당하면서 조선에 늘어나는 외세의 간섭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식인들은 성리학적인 가치관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개화 사상이 뿌리내리긴 힘든 상태였다. 개화파는 일본을 이용해서 외세와의 교류를 통해 세계에 발 맞춰 나갈 것을 주장했다. 지배층은 의견을 통합하지 못하고 수구파와 개화파의 갈등의 문제도 존재했다. 그리고 특히 조선은 자강운동을 펼쳐나가기에 상황이 받혀주지 못했는데 일본에 유리한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격는다. 갑신 정변은 신식군대를 기르고 총을 달고 다니게 하면서 구식군대는 그 대우를 아주 박하게 하였다. 특히 급료(쌀)에 돌이 섞이는 상황이 발생하고 구식군대의 불만이 폭발하여 나타난 것이 임오군란이고 조선의 개화파들이 일본의 힘을 빌려 메이지 유신과 같은 개화 정권을 세우려 한 정변을 이야기 한다. 1884년 청불전쟁이 일어난다. 이 틈에 일본이 조선에서 청 중앙군을 밀어내려고 한다. 서울에 있던 일본 공사가 급진적인 개혁파에게 도와주겠다는 밀약은 한다. 그러나 그만큼 준비된 인력이 없었다. 임금이 피신하는 등 국내 정세가 어지러웠으나 결국 개혁은 3일 만에 끝나 3일 천하라 부른다. 1884년 텐진조약으로 일본과 청나라는 서로 조선에 개입하지 말자는 합의를 한다. 양국은 우선 조선에서 철수를 하고 만약 개입하게 될 때에는 상대방에게 알리고 들어오자는 약속을 한다. 청군은 물러났지만 사실적으로 일본은 완전히 물러나지 않았었다. 동학 농민 운동도 일어나고 한반도 안에 혼란은 극에 달했고 수습을 돕겠다며 청나라와 일본은 계속 간섭한다.

중국은 베트남에 집착한다. 베트남과 중국은 조공 관계였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반절 차지한 상태였고 나머지 반절을 탐내는 중이었다. 응유엔 왕실은 그대로 두고 프랑스가 지배하는 특이한 식민주의를 펼쳤다.

– 19세기말의 동아시아 전쟁

청일전쟁(1894-5)

일본은 한반도에 러시아가 들어오는 등 다른 나라가 한반도를 장악하게 되면 스스로가 위험에 처 할 것이라 생각했다. 일본 경제가 1885년부너 경제 발전을 급속도로 이룩하고 방직, 섬유산업이 부흥하여 생산이 초과되었다. 일본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해외로 그 물건들을 팔아야 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 정책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한반도를 장악하길 바랐고 그에 따라 영국은 일본을 지원했다. 영국은 청일 전쟁 중 영국의 치외법권 조항을 풀어 주고 교역을 많이 하는 등의 지원을 실시했다. 한반도의 내부 사정은 많이 불안했다. 한반도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고 군사를 텐진 조약에 의해 한반도로 내보낼 명분을 확보한 일본은 일본 군대를 한반도로 보낸다. 농민 봉기를 진압한 후 일본은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청이 수용할 수 없는 조선 내정의 공동 개혁을 제안한다. 그것에 거부하자 1894년 8월 1일 일본은 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정식으로 개전한다. (81쪽) 일본은 황해에서 대규모로 승리하고, 평양에서도 승리한다. 중국은 일본 대응 전략을 잘못 세웠다. 자신들의 위상에 맞게 서양에서 큰 배를 들여왔다. 전쟁에 효율적이지 않은 배였다. 일본은 중국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며 기동력 좋은 배를 구입하였다. 전쟁은 중국에 패배로 끝이났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전력을 다했었고 중국은 부분적 양보를 하더라도 완전한 패배만은 피하자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전쟁의 결과로 강화조약을 맺게 되는데 일본의 1년 예산 1억여엔의 3배가 넘는 금액을 중국에 요구하고 타이완, 라오둥 반도의 펑후 열도를 할양 할 것, 그리고 도시를 개항 할 것을 요구한다.

전쟁의 결과로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주도의 본격적 제국주의 시대가 시작되고 전후 이득으로 인해 일본은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발전한다. 러,프,독 3국은 일본이 중국을 이겼다는 사실에 경계하여 일본에 간섭한다. 유럽이 중국내의 이권을 쪼개가기 시작한다. (과분) 일본이 힘을 얻고 조선의 자주개혁은 좌절되고 3국 간섭을 포함한 구미열강이 일본을 간섭하여 일본은 수모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위기의식이 고취된다.

청일 전쟁 이후 중국이 일본에 배상금을 요구했으나 중국 상황에서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중국의 이권과 일년 예산, 국채, 세금을 증가하여 그 배상금을 처리해 나갔다. 일본이 중국에게 직접적인 돈을 받지는 못했다. 중국에게 빛을 진 나라들이 그 빛을 일본에 갚는 방식으로 배상금이 일본에 들어간다. 이런 방식의 배상금 지불은 일본인 당장 운용 가능한 자산으로 사용 되지는 못했다. 일본은 다른 제국주의에 비해 아직 아시아 내에서만 강대국 취급하였다. 일본은 금본위 제도를 하고 싶었는데 배상금으로 인해 금본위가 가능해 졌으며 그에 따른 경제 발전의 효과도 가져왔다.

청일 전쟁을 통해 일본은 승리를 얻어 내었고 그에 따른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세계 10대 강대국 안에 들겠구나 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일본은 중국에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싶었는데, 러시아가 견제했다. 요동반도는 러시아 일본 사이의 경로에 있어 러시아도 요동반도를 원했다. 일본은 전쟁이 끊나고 많이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영.미 가 일본에 친하게 대해 주었지만 일본의 침략적인 행동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아직 유럽 국가들을 포함하여 강대국의 눈치를 봐야 했다. 결국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하여 일본은 반러 감정이 생겨났다.

청 조정의 무력이 계속적으로 노출 되었고 열강의 침탈은 끊임 없었다. 북경일대 생황이 아주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서양 놈들 때문에 우리가 못산다”라는 의식이 퍼져 갔다. 농민 경제의 피폐와 불만으로 인한 출구가 필요했다. 변법자강운동이 실패했고 중국의 외세개입은 갈수록 커졌다.

거기에다 “ 하늘에서 천부인이 떨어지면 그것을 쥔 사람은 주먹만으로 총을 상대할 수 있다”는 미신이 많아진다. 사람들이 모여 의화단을 형성했고 대사관 등을 공격하고 부청멸양을 내세웠다. 그 시대 지식인들에게는 변법자강운동 등 청나라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주루였는데, 의화단의 ‘부청’은 그들의 뒤에 정부가 있다는 의심을 하게 만들었다. 외세들은 의화단 운동을 막기 위해 연합군을 만들었다. 그러나 먼 곳에 있던 서양 열강들은 적은 수의 군대만 파견했고, 러시아는 많은 수의 군대를 파견한다. 이 연합군에 서양 열강은 일본을 참여하게 한다. 외국 군대가 의화단을 진압한다. 이 연합군은 배상금을 요구하고 외국군을 주둔시킨다. 일본은 당장 물러갔고 러시아도 물러나길 바랐으나 러시아가 중국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일본은 자신들에게는 주권선과 이권선이 있는데 일본의 이익을 지켜야 하는 선까지는 지킬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한반도를 일본에 자국선 안에 포함시키고 만주까지 이권선 안에 포함 시켰다. 러일 갈등이 표면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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