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 사유의 전통 – 기말 에세이

6월 1일 선거가 있었다. 한 사람당 7개나 되는 투표용지, 그 속에 특이한 투표용지 하나가 있었다. 정당을 명시하지 않고 이름만 적혀진 투표용지였다. “현행 교육감 주민직선제의 탄생은 기존의 교육감 선거에서 부정비리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제기되면서 이루어졌다. 결국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정부는 2004년 12월 교육감 선출방식을 직선제로 추진한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다.”[1] 2010년부터는 지방선거와 함께 교육감 투표를 했다. 그리고 지방선거와 함께 실시 되는 교육감 투표가 2014년 6월 1일 2번째로 실시되었다.

교육감 직선제, 그 자체로 우리사회에 아이러니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고등학교 선생님 중 한 분은 정치 활동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났다. 전교조 선생님이 학생들과 독서 모임을 만들면 압력을 받았었다. 전교조라는 이름은 빨갱이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 여기는 이 사회이다. 교육에 철저한 정치적 중립성을 요구하고, 정치적 성격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제제를 가하는 이 사회에서 교육감 투표라니. 또 교육감 관련 선거관련 언론에서는 결국 정치적 중립성을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듯, 진보 보수 교육감으로 나누어 보도했었다.

이런 아이러니를 분명 인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 직선제가 시행되고 있는 이 사회는 ‘내 아이의 교육하는 방향’에 직접 간섭하자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생각 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세계 어떤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열되어있다. 대한민국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돈을 벌고, 아이를 키우며, 교육시킨다. 아이들을 각각의 특성을 이해하기 보다, 모두 공부를 해야 했다. 학창시절은 학교를 다니는 기간을 넘어 공부만을 해야 하는 기간이라는 사회적 압박이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교육에 대한 불신도 만만치 않다. 한 아이에게 들어가는 사교육비는 어떤 가정에서는 가계를 위협할 정도로 학부모들은 공교육을 믿지 못한다. 객관식 문항으로 이루어진 학생들의 평가는 사실 편리함보다는 채점자의 주관을 믿지 못하는 것, 즉 다른 이를 뛰어 넘어야 하는 경쟁에 사람에 대한 평가가 기반이 된 교육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학 서열에 대한 집착도 이러한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학에서 진짜 배우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서로 특정 대학의 등급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기에 이르니 누가 대학 서열에 무관심 할 수 있을까.

우리사회는 교육에 대한 큰 관심과 함께 모순되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많은 질문이 존재 하게 된다. 우리의 교육열은 어디에 기반을 두는가? 교육은 정치적 중립인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실현 가능한가? 우리나라 교육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이 의문들을 논어를 기반으로 논해 보려 한다.

우리 스스로 또는 외국에서 한국 교육열의 원인을 유교문화에 두고 해석한다. 유교문화를 공유하는 일본, 중국과 같은 주변국의 모습을 보면 가능한 해석이다. 유교의 경전인 『논어』는 학이(學而)로 그 내용을 시작한다. 그리고 논어 전체에 걸쳐 공부(學)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유교는 관료주의 사회에 기반한다. 전통적인 관료주의 사회에서 출세의 방법은 공부였다. 집안이 특별하지 않은 이상 국가에 등용되기 위해서는 과거 시험을 봐야 했고 공부를 해야 했다. 그렇게 공부는 전통적인 출세의 방법이었으며 국가의 녹을 받고 사는 것은 명예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사회의 분위기는 자본주의 사회로 들어와서도 유지 되었는데, 한국의 사회는 싼 인력을 기반으로 경제 발전을 했기 때문에 공부를 통해 공장에 들어가지 않고 직업을 얻는 것이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길이었다. 한국사회의 교육열은 이렇듯 공부를 중요시하고, 그 공부로 얻은 사회적 위치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유교 문화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학(學)을 지금의 공부라고 쉽게 변역 해 버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국의 공부라는 단어는 대부분 아주 좁은 의미만을 내포한다. 대학입시, 취업을 위한 준비를 우리는 공부라 부른다. 그러나 유교, 『논어』에서 의미하는 공부(學)는 그 의미가 다르다. 우선 유학은 춘추전국시대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의 해결책과 고통 받는 국민들과 혼란한 사회 속에서 국가는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라는 끊임없는 질문에 대한 공자가 제시한 해답을 기반으로 한다. 공자는 자신의 해답을 온 마음을 다해 위정자들이 익히길 원했고, 더 나아가 그런 통치자들은 유교가 원하는 ‘덕’을 갖추고 ‘인’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통치자로 나아가기 위해 익혀야 하는 것 그것이 『논어』에서 말하는 공부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논어』의 주석을 정리하고 유교의 방향을 제시한 ‘주자는 유학을 불교처럼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학문으로 변모시켰다’[2] 유교의 공부는 지금의 교육열이 얻고자 하는 지식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 교육은 ‘선생’, ‘학생’, 그리고 선생님이 가르쳐야 하고 학생이 익혀야 하는 ‘내용’으로 이루어 진다. 『논어』안에서 말하고 있는 교육은 세가지를 『논어』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정말 많은 선생님이 있다. 학창시절 선생님들부터, 학원 선생님, 학습지 선생님까지, 사양한 선생님이 존재하나,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효율적인 지식의 전달” 딱 한가지 인 경우가 많다. 어떤 종류의 교육을 받던 가장 잘 가르치는, 시험에 나오는 것을 잘 알려 주는 선생님을 찾는다. 학생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훌륭한 학생은 주어진 지식을 효율적으로 익히고, 제한된 시간 내에 시험지를 잘 풀어내는 학생이다. 반면 『논어』에서는 다르게 이야기 한다.

2-11 공자가 말하였다. “옛 것을 탐구하여 새것을 알아야 스승이 될 수 있다.”
7-2 공자가 말하였다. “묵묵히 기억하거나, 배움에 싫증 내지 않거나, 남을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는 일 가운데 어느 것이 나에게 있는가?”

지금 사회에 맞게 해석 하자면 옛 것이라 함은 지금까지의 지식, 즉 학생들에게 알려 줄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선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끊임 없이 새것을 배울 것을 요구한다. 선생을 하나의 완성 단계로 보지 않고 학생과 같이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존재로 보고 있다. 현대의 선생님도 계속 교육을 받고 있지만, 논어에서 이야기 하는 새것을 계속 배우고 있는 것인가? 많은 선생님들은 아마 임용고시를 위해 공부했을 것이고, 그 이후에는 더 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날로 지식은 발전한다. 그 속에 어떤 선생도 학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9-11 안회가 아아 탄식하며 말하였다. “우러러볼수록 높기만 하고, 파고들수록 굳기만 하시다! 바라보면 앞에 계신가 싶더니, 홀연히 뒤에 계신다! 선생님은 차근차근 인도하시어, 학문으로써 나를 넓혀 주고, 예로써 나를 단속하신다. 그만두려고 해도 그러지 못하고, 내 재주를 다 발휘하게 하신다. 도달하신 그 경지가 우뚝하니(까마득하니). 따르려 해도 따를 수 없도다!”

7-7 공자가 말하였다. “속수 이상의 예를 행한 경우, 나는 깨우쳐주지 않은 적이 없다.”
15-39 공자가 말하였다. “교육에는 부류를 따지지 않는다.”
9-8 공자가 말하였다.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아는 것이 없다. 미천한 사람이 나에게 물어올 때, 그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나는 일의 양단을 타진한 다음 최선을 다해 알려줄 뿐이다.”
무엇보다 선생은 학생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면 어떤 학생이든, 최선을 다하는 것, 공자를 통해 그러한 선생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4-17 공자가 말하였다. “현인을 보면 같아지기를 생각하고, 못된 사람을 보면 안으로 자신을 반성하라.”
7-22 공자가 말하였다. “세 사람이 동행하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좋은 점은 택하여 따르고, 나쁜 점은 고친다.”

위의 선생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들은 여전히 당연하게 받아들여 진다. 그러나 『논어』에서의 선생은 특정 인으로 한정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야기 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반면교사 삼아 배우고 깨우칠 수 있다면, 그것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스승인 것이다. 공자가 유교에서 가장 큰 선생임을 생각 할 때, 자신을 학문을 끊임 없이 사랑한다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에서, 잘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 미치지 못하듯 유교에서는 그 학문을 사랑 하는 사람을 가장 큰 선생의 기본임을 주장한다.

학생의 입장, 결국 어떻게 배움을 받아 들이고 익혀야 하는 가에 대한 이야기는 『논어집주』 가장 앞에 ‘『논어』·『맹자』 읽는 법’에 잘 나타나 있다. 학생들에게 논어를 읽기 전, 『논어』를 읽는 법을 명시한 것은 주자가 얼마나 『논어』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그 책을 읽는 자세나 방법 또한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학생은 『논어』·『맹자』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독서할 때 성인이 경전을 지으신 뜻, 성인의 마음가짐, 성인이 성인에 이른 까닭, 내가 성인이 되지 못한 까닭, 내가 깨닫지 못한 까닭을 살펴야 한다. 한 구절 한 구절 탐구하고, 낮에는 외우면서 음미하고, 한밤에는 생각하며, 평온한 마음과 느긋한 정신으로, 의심 난 곳은 일단 유보해 두면, 성인의 뜻을 읽을 수 있다. 학생은 『논어』 속 제자들의 질문 내용을 자기 질문으로 여기고, 성인의 답변을 오늘 들은 말씀으로 여기면, 자연히 터득이 있다. 성인의 말씀을 절실하게 받아들여야지, 한바탕의 말로 여기면 안 된다.”[3]

2-15 공자가 말하였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몽매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19-6 자하가 말하였다. “널리 배워 뜻을 돈돈히 하며 절실히 질문하고 자기를 빗대어 생각하면, ‘인’은 그 안에 있다.”
7-8 공자가 말하였다.”스스로 번민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못하고, 스스로 끙끙거리지 않으면 꽃피워 주지 못한다. 한 귀퉁이를 가르쳤을 대 다른 세 귀퉁이를 유추하지 못하면,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
학생은 배우는 것을 쉬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성인들의 말씀을 익히는 만큼, 그것을 익힐 때 온 마음을 사용 하여 이해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극단적으로 생각을 통한 유추, 즉 적절한 깨달음이 없다면, 공자는 다시 가르치는 것을 거부 한다.
5-14 자로는 어떤 가르침을 듣고 아직 실천하지 못할 경우, 다시 새로운 가르침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14-24 공자가 말하였다. “옛날 학생은 자신을 연마하였다. 요즘 학생은 남을 의식한다.”

사유를 통학 학습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실천도 중요시 했음을 볼 수 있다. 옛날 학생과 요즘 학생을 비교 한 부분은 우리사회에도 적용 된다. 끝 없는 경쟁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 특정한 경지를 달성 하는 것이 아니고, 남보다 더 잘하는데 온 신경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통하는 사회이다. 『논어』에 공자는 그러한 학생들을 꾸짖고 있으며, 곧 현대 사회 학생들에 대한 꾸짖음이다. 『논어』의 앞 뒤에 위치한 것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말아야 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논어』를 공부하는 이는 모두 학생이고, 남에 대한 의식을 떨쳐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 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논어』 앞 뒤에 배치함으로써 학생들에게 경강심을 일으킨다.

학생들은 남보다 공부에 신경 써야 한다. 이것이 『논어』전체에서 학생에게 가장 크게 요구하는 것 중 한가지 일 것이다. 공부는 『논어』 그 자체이다. 공자는 학문, 실천, 충직, 신의를 가르쳤다고 한다.( 7-25) 유교에서 공부는 학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학문을 통한 실천과, 학문을 절실하게 공부함으로 써 얻는 충직과 신의 모두 공부로 여긴다. 『논어』에서 공자는 학생들이 학문을 배우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모습이 다음과 같길 원하였다.

1-7 자하가 말하였다. “현자를 미인보다 더 존중하며, 부모를 섬길 때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임금을 섬길 때는 목숨도 바칠 수 있으며, 친구와 사귀면서 말에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라면, 그가 못 배웠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운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13-5 공자가 말하였다. “『시』 삼백 편을 외웠어도 정치를 맡겼을 때 통달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사신 갔을 때 단독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이 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7-9 공자가 말하였다. “너희는 왜 『시』를 공부하지 않는가? 『시』를 배우면 분발할 수 있고, 안목을 기를 수가 있고,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고, 원망을 표출할 수 있다. 가까이는 부모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는 일, 및 조수초목의 이름도 많이 알 수 있다.”
6-3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제자 가운데 누가 학문을 사랑합니까?” “안회(안연)라는 제자가 학문을 사랑하여, 분노를 옮기지 않았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었습니다. 이제는 없습니다. 아직 학문을 사랑하는 이를 알지 못합니다.”

실천이 기반이 되면 배우지 않았더라도 배운 자로 여겨질 수 있으며, 결국 학문을 통해서 얻으려 하는 것이 정치능력과 외교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공부했다고 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또한 학문을 익히고 사랑하는 것은 분노와 원망을 조절과 연관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고, 결국 공부를 통해 인간적 성숙을 성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공자는 결과를 통해 공부의 필요성을 논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분명 능력이 있거나, 공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지혜, 믿음 따위는 계속된 공부가 없으면 폐단이기에 경계하라 이야기 한다.

17-8 공자가 자로에게 물었다. “너는 6언(주장) · 6폐를 아느냐?” “아직 모릅니다.” “앉아라! 내가 너에게 말해 주겠다. 인을 좋아하고 학문을 멀리하면, 그 폐단은 어리석음이다. 지혜를 좋아하고 학문을 멀리하면, 그 폐단은 방종이다, 믿음을 좋아하고 학문을 멀리하면, 그 폐단은 해침이다. 정직을 좋아하고 학문을 멀리하면, 그 폐단은 난동이다. 강직을 좋아하고 학문을 멀리하면, 그 폐단은 조급함이다.”
『논어』에서 이야기 하는 공부는 더 넣게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학생이 먼저 『논어』·『맹자』를 읽는 일은 마치 척도와 기준을 갖추는 일과 같다. 그것으로 사물을 헤아리면 자연히 장단·경중을 알게 된다.”[4]고 주자는 『논어』·『맹자』읽는 법에 명시하고 있다.
6-19 공자가 말하였다. “인간의 삶(탄생)은 올바름이다. 허위의 삶(생존)은 요행히 모면함일 뿐이다.”
19-7 자하가 말하였다. “모든 장인이 공장에 머물며 자기 업무를 완수 하듯, 군자는 학문을 하여 자기의 도를 완성한다.”

장인이 업무를 잘해야 장인이듯 군자들을 학문을 장해야 될 수 있다. 『논어』는 전체적으로 군자를 지향하는 내용으로 이루어 져있다. 군자는 ‘인’을 갖추고 녹을 받을 만한 인물로 묘사됨을 기억할 때, 공부는 군자에게 ‘도’를 완성하고, ’인’을 갖추는 방법이다.

이런 것들을 얻은 학생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적절한 위치에서 국가의 녹을 받고 통치하는 것이었다. 공자 교육의 가장 근본적인 목표는 올바른 위정자 양성이었다. 교육의 ‘철저한’ 정치적 중립성을 요구하는 현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철저하게 정치적인 교육이었던 것이다. 현대는 사회가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다스려짐 받는 백성과 통치할 사람들이 나누어져 있던 사회와는 달리, 그리고 통치 목적만으로 교육받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 모두가 교육받는다. 많은 사람들은 동등하고 같은 교육을 추구하기에 정치색을 배제하려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는 국민이 국가의 주인인 사회이다. 국가를 움직이는 정책에 각각의 국민은 참여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올바르고 제대로 된 그 준비는 교육에서 행해져야 하고 그러므로 여전히 교육은 정치적이어야 한다.

위와 같은 교육은 우리 사회에서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지식의 전달이 끝이 아니라 귾임 없이 생각하게 하며, 『논어』·『맹자』와 같은 컨텐츠로 이루어진 교육은 자본주의 사회에 도움이 되는 전문인 양성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효율성을 따져보면, 언제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들이는 예방에 힘쓰는 것이 항상 효율적인다. 수많은 안전 예방 교육을 하는 까닭은 한사람 한사람이 중요성에도 그 원인이 있겠지만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에 시행 한다. 『논어』에 기반한 교육 시스템은 이러한 예방을 가능케 하는데 도움을 준다. 사회에 문제가 생기지 않고 제대로 돌아가지 위해서는 자기 위치에 맞는 일을 해야 한다.

3-7 자로가 공자께 물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시고 정치를 하면 무슨 일부터 하시겠습니까?”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 “역시 그러시군요. 선생님은 답답하십니다. 하필 이름을 바로 잡으십니까?” “너는 너무 모른다! 군자는 자기가 모르는 것은 가만히 있는 법이다. 만약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주장(말)이 정연하지 않고, 주장이 정연하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성취되지 않고, 일이 성취되지 않으면 예악이 흥성하지 않고, 예악이 흥성하지 않으면 형벌적용이 올바르지 않다. 형별 적용이 올바르지 않으면, 백성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이름을 붙였으면 반드시 주장할 수 있어야 하고, 주장을 했으면 반드시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군자는 자기주장에 애매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이름에 맞는 주장과 실행을 하는 것이 이름을 바로 잡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 백성을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과의 교류 속에 존재하는데, 나와 다른 사람의 이익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하고 사회질서가 혼잡해진다. 그리고 그 와중에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는 황금률은 인간 사회를 원활하게 만들 뿐 아니라 각 사회에 있는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자신의 편함 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게 하기 때문에 이 황금률( 6-20 어진 사람은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이루고(통달하고) 싶으면 남도 이루게 해준다. 자기 처지에서 남의 처지를 유추할(이해할)수 있음이, 인의 방법이라고 하겠다.)을 내면화 하도록 교육 하면 큰 사고를 예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논어』 속에서 말하는 공부, 교육이 필요하고 생각한다.
현재의 우리 교육체계에서 이와 같은 내용들이 학창시절 도덕책에서 볼 수 있으나, 학생들에게는 그 특별한 말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길 요구한다. ‘성인이 되지 못한 까닭이나, 성인이 그 말을 한 까닭 따위를 생각해 보도록 교육 받지 못했다. 우리는 그 결과를 세월호 사건에서 뼈져르게 느꼈다. 많은 보도와 사실에서 어떤 사람도 자신의 일을 제대로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으며, 모든 사람들은 자기만 살기 바빴다. 몇몇이 자신의 위치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을 갖고, 자신의 목숨보다 다른 사람을 걱정 했다면 훨씬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살아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너무나 크게 남는 사건이었으며, 우리사회가 많이 망가져 있음을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이 사회에서 사회의 일원으로써 잘 작동할 수 있도록 교육했어야 할 교육 시스템이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 정책이 바뀐다. 교육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은 만큼 교육 시스템에 변화를 주어 민심을 얻고 싶은 듯하다. 그러나 민심에 관심 있을 뿐 어떤 교육을 지향해야 하는지는 아직도 길을 못 잡고 있는 듯하다. 위에서 『논어』속에서 교육의 목적, 선생과 학생의 마음가짐과 교육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 한 부분들을 나열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속에서, 지금의 우리 교육은 왜 이렇게 못하는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정체성을 위해서도 논어에 기반한 교육이 필요하다. 우리 문화에 맞는 교육을 하고 있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시민 혁명 속의 주인공이었던 프랑스는 필수 과목으로 시민 교육을 받는다. 시민으로써의 그들의 의식은 그들의 정체성과 맞닿는다. 일본과 중국 또한 역사와 한자 교육은 기본이다. 미국은 창의성, 독창성, 개성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중심으로 교육한다. 다양한 민족과, 독립혁명 그리고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승리하는데 도움을 준 창의적 생각은 미국 사회의 단면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화려한 서양과 미국식 문화 앞에서 그들을 쫓아가는데 급급한 것 같다. 우리 스스로 행하고 있는 예절의 정체성을 국가의 교육이 아닌 가정교육으로 이어나가길 바라는 것 같다. 그리고 한편으로 우리 문화의 모습을 무시하면서 교육은 진행되어 왔다. 결국 우리는 제사, 존칭, 관계에 따른 호칭 문제, 사람간의 우리 식 예의 범절 따위의 것들은 그 의미를 생각하는 교육을 받지 않아, 그 의미를 익히지 못해 허례허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결국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간에 세대간의 갈등이 극심해지고, 우리 스스로가 행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정체성에 혼란스러워 한다. 사실 우리는 창의성보다도 기록을 중요시 했으며, 예절을 중요시 했다. 우리 스스로 조선왕조실록의 진실한 의미를 이해 하지 못하고 있으며, 예송논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7-20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날 때부터 안 사람이 아니고, 옛 것을 좋아하며 열심히 추구한 사람일 따름이다.”
7-28 공자가 말하였다. “알지도 못하면서 지어내는 자도 있겠으나, 나는 그런 일이 없다, 많이 듣고 그 중에 좋은 것을 가려 붙좇고, 많이 보고 기록해 두면 앎의 둘째 경지는 된다

공자가 위와 같이 이야기한 문화적 배경을 이해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에 기반한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 역사를 제대로 이해 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동양식 인식방법을 완전히 잊고, 서양의 공부 방식을 따르고 있으나 우리 문화 속에 녹아 있는 방식과 맞지 않는다. 그런 교육 방식으로 우리는 종종 우리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지식만을 받아 들이고 있으며, 그 지식의 체계 역시 서양의 사유 체계에서 나온 것인지 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 속에서 우리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분명 세계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를 알지 못하면 그들의 것도 제대로 이해 할 수 없다. 개인이 있고 사회가 있고 국가가 있다. 그리고 ‘내’가 속한 대한민국과 동아시아 문화를 기반으로 다른 것들을 인식해야 한다. 옛 것을 알아야 새로운 것을 익힐 수 있듯이, 그리고 그리해야 더 큰 이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문화를 기반한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 문화의 중심에는 『논어』가 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1] 박영호. (2010). 한국형 교육감 선거제도 . “2010년도 국회연구용역과제 연구보고서 ” (페이지: 1-2). 한국의회발전연구회.
[2] 주자, 역자 박성규. (2011). “논어집주.” 소나무
[3] 위의 책 14쪽, 15쪽
[4] 위의 책 14쪽,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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