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이용덕, 아르테

요즘 크레마 덕분에 책을 많이 읽긴 하지만

전자책이라 그런지 메모하는 습관은 줄어들었다.

특히 전자도서관에서 빌리는 책은 기기로 메모를 할 수 없는 구조라서

책갈피만 딱 하고 만다.

나중에 메모해야지 하다가도

자동 반납이라는 편리한? 기능 덕분에

책 구절을 정리하는 것을 잊곤 한다.

이번에 빌린 책은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읽는데 만 하루정도 걸린거 같다.

짧은 소설이기도 했지만 흡입력 있었다.

소설을 읽고 싶어지면 몇 출판사들의 세계문학전집을 살펴보는 편이다. 그 중에서도 서양 문화권에 속한 책을 선택하는 편이다. 다른 사회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기도 하고, 사실 ‘세계’는 아직까지 ‘서양’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 전집에 그 종류가 다양 한 까닭에 선택하게 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금더 감정적인 이유가 있다. 한국 문학을 읽으면 별로 기분이 좋았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왜 한국 문학을 읽고 싶어하지 않는 것인가. 언제 내린 결론인지는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와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 후 머리속에 박힌 답이 있다. 한국 소설을 읽을 때는 소설 속의 내용에 대해 감정적으로 “너무” 잘 빨려들어가 버린다. 너무 익숙한 모습들 역겨운 사회상을 고발하고 표현하는 문학들을 읽으면 눈물도 더 잘 나고 화도 더 잘나고 내 주변의 상황을 더 잘 이입해서 보게 된다. 나는 이 기분이 싫다.

어떤 소설이건, 영화건 어느 문화에 기반하는 가에 상관없이 물론 나의 현재 상황과 비교하고 대입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문학을 읽는 나는 그 정도가 심하여 감정적으로 지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서양 문학을 주로 읽는다. 한발 짝 뒤로 물러나서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사회상 속에 들어가 이방인 처럼 주위를 둘러본다.

같은 이유로 동양 문학을 잘 읽지 않았다. 웬지 한국 문학과 비슷한 느낌을 품길 것 같아서. 그래도 한국 문학은 수헙생활, 필독서 목록 때문에 좀 읽었지만 중국, 일본 그 이외의 나라들의 문학은 내가 책을 직접 집어들 이유가 없었으니 접할 일이 없었다.

독일이라는 곳에서 하는 일도 없이 집에만 앉아 있는 생활이 계속 되고 있다. 셰계문학 전집 중 몇권을 읽었다. 전자 도서관에서 소설을 몇권 빌려 보았다. 서양 문학 한 5종류를 몰아 보고, 요즘에 유명했던 <채식주의자>도 읽어보고, 문득 눈에 띈 <아Q정전>도 읽어 보았다. 그리고 얼마 전 전자도서관 앱에서 일본 소설 항목에 들어가 보게 되었다. 사실 이전에도 몇변 무심하게 클릭했지만 딱히 구미가 당기는 책은 없었다. 이번에는 멀리 돌아와 이곳 저곳의 소설을 읽은 다음에 들어와보니 문득 한권이나마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선택한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제목에 ‘죽음’이 들어가 있다. 책 표지에 죽음이라는 글자가 써 있으면 으레 느꺼지는 약간의 무거움이 이 책을 선택할 때는 없없다.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라는 말이 “너 힘들면 내가 이런 이런 조언을 줄 수 있어, 그리고 이러한 내 조언을 따르면 너는 행복해 질거야.”라고 말하고 싶은 자기 계발서의 멋부림으로 보였다. 그러한 느낌을 가지고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거기에 인간의 악의를 모두 다 진열하고 싶어요”

“인류란 어느 세기 어느 지역에서 태어나건 본질적으로 별반 달라지지 않는 것이고, 이놈이든 저놈이든 죄다 쓰레기들뿐이라는 거, 이런 책을 보면 알아요. 아니, 이런 책을 읽으면 나는 안심이 돼요.”

“비극이라도 너무 철두철미하면 도대체 뭐가 뭔지, 어이가 없어져요. 이를테면 칭기즈칸

– 성을 공격할 무기가 없었던 칭기즈칸은 사로잡은 민간인들을 인간 방패로 내세워 화살막이로 이용했다. 수비대의 선택은 모든 화살을 이 민간인들을 죽이는 데 사용할 것이냐, 아니면 화살을 쏘지 못해 항복할 것이냐,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마녀 판정을 받고 화형단한 여자의 자식들까지 태워 죽이지 않은 것이 최대의 회한이다. 지나치게 관대했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는군요. 네, 인과응보니 천벌이니, 그딴 건 있지도 않았던 거예요.”

“진짜 평범한 집안. 그게 오히려 콤플레스.”
“너무 평범해서 기댈 게 없거든요.”
“트라우마나 가정폭력 경험 같은거, 난 일종의 지팡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심리적 계기가 되거나 변명거리가 되기도 하죠. 그걸 액세서리로 쓰는 여자애들도 많고. 또 현대의 유행병에 함께한다는 느낌도 들고. 근데 난 그게 없어요.”

“그런데 살아간다는게 그런 거겠죠, 나쁜의미에서. 살아간다는 거, 오래오래 장수한다는 거, 그런 식으로 티끌만 켜켜이 쌓이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런 티끌을 억지로 돈이라고 믿어버리는 건 싫어요. 티끌은 티끌이라고 말해야죠. 인생경험 따위, 티끌일 뿐이에요”

“아니, 싫어요. 타혐으로 오래오래 살아서 비굴해지고 추해지는 건 절대로 싫어요. 억지로 하는 긍정같은거, 어차피 전면 항복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했어요. ‘우리의 목적은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해악으로부터 가능한 벗어나는 것’이라고”

“죽읍시다. 동반자살, 그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 방법이에요. 유일한 방법, 제대로 존재할 수 있는 삶의 방식. 의지와 목적과 결과가 일치하고 게다가 성공의 순간이 그대로 영원이 되는 유일한 아이디어.”

-하쓰미

“사실 사별이든 생이별이든 별반 다를 것도 없잖아요 (중략) 솔직히 몇 년 뒤에는 더이상 못 볼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그럴 거라면 자연소멸적으로 가타오카 씨의 인생에서 우리가 사라지는 것과 단순히 우리의 삶이 사라지는 것, 그 둘이 카타오카 씨에게 뭐가 그렇게 다른가. 그렇게 따져보면 단지 충격적인 뉴스를 듣고 싶지 않은 것뿐이고, 근데 그것도 단순히 충격을 받고 싶지 않다는 자기 본위의 얘기일 뿐이고……”

-도쿠야마

수 없이 떠들어 암울한 미래에 대한 뉴스는 끊임없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가,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어린 시절 성공 스토리를 보면 그 주인공이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세상을 나를 중심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힘 없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은 메아리가 되고 인간 피라미드 아래의 사람들은 1:1000 경쟁률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 세상을 변하지 않을 거 같고 나의 위치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어진다.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 가에 대한 질문은 곧이어 살아 남을 필요가 있는 가라는 의문을 남긴다.

하쓰미는 인류의 잔인함을 묘사하는 자료를 읽으며 도쿠야마와 성행위를 한다. ‘잔인한’ 역사적 사실을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주위 깊게 탐하 듯이 읽어 내려가고 하쓰미는 안심이 된다고 말한다.

삶에 질려버렸다. 이런 느낌이다.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계속 확인함으로써 안심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문득 오늘 갑자기 죽어버리면 어떻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자살을 할만 큼 극심한 이유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고가 일어나서 더이상 내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삶에 별로 미련이 없는 스스로의 모습에 약간 놀라긴 하지만 금새 무감각하게 뭐 어때 하고 생각을 종료해 버린다.

“의지와 목적과 결과가 일치하고 게다가 성공의 순간이 그대로 영원이 되는 유일한 아이디어.”라는 말이 매혹적으로 들린다. 완벽해 보인다.죽음을 마주하는 하쓰미의 모습이 내 모습같아서 책은 다 읽었지만 그녀를 놓기 힘들다. 그녀의 연인 도쿠야마처럼 그냥 모두 분출해 버리고 같이 사라지고 싶다. 소설 마지막, 한 멘션 안의 두 사람의 존재는 희미해져 간다. 나는 그들을 간직한 채 살아가야 한다. 그들이 부러워 진다.

“안이한 희망 의존증을 과감히 베어내는 힘이 이 소설에는, 있다. 참된 희망은 그 끝에 존재한다” – 호시노 도모유키(소설가)
소설 뒤에 있던 한 평론가의 글이다. 참된 희망은 그 끝에 존재한다고 했다. 어디에 있는가. 나는 잘 모르겠다.

역자는 후기에 “인류와 인간이 빛어낸 ‘악의를 모두 다 진열’해놓고 진저리를 치다 참을 수 없어 토하고 그 토사물의 더러운 달콤함에 빠져 서서히 익사하는 것 같았다. 홤멸과 타락, 부정과 죽음을 향한 여행 안내서, 라고 하면 독자는 달아나고 싶어질까.”라고 썼다. 적어도 나는 오히려 달려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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